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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미디어의 폭력앞에 노출된 아이들

중앙일보

입력

김상진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이 전국 관객 백만을 넘었다고 한다. 뜻밖이다. 아마도 김감독 스스로도 기대치 않았던 흥행수치일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젊은이들의 대책없는 폭력사태를 다룬 이 이야기가 요즘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했을 가능성도 높다는 생각이 든다. 장선우감독의 요즘 말마따나 "그래, 나 이렇게 논다. 어쩔래!"의 심정일 수 있겠다. 특히 영화속 주인공이 "제2건국위 운운"하는 한자 표구를 보다가 어려운 말을 쓴다며 마구 때려 부수는 장면같은, 그 단순성에 관객들은 오히려 통쾌해 하는 것 같다. 연일 사회사건이 줄을 잇다 못해, 방송과 신문 모두가 어떤 아이템을 톱으로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세상이다. 젊은이들의 이 '이유없는 반항'은 그래서 일견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TV 등 미디어가 청소년들, 혹은 젊은 시청자들을 오염시키고 중독시키는 해악적인 요소에는 늘 신경이 쓰인다. 영화와 TV의 폭력물들은 분명 "그만큼" 폭력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사회 구성원들, 특히 청소년들은 폭력적인 매체를 또다시 모방하는, 물고 물리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은 주유소라도 습격하고 싶은 "요즘 아이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정작 이 영화가 인기를 끌면 실제로 주유소 습격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집에는 초등학교 2학년생인 딸이 있다. 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는 〈인기가요 20〉이나 〈이휘재 남희석의 멋진 만남〉같은 것이다. 채정안이 부른다는, 일명 "울랄라"라고 불리는, 〈무정〉이란 노래도 딸아이때문에 알았다. H.O.T의 카세프테이프, 특히 이번 4집 테이프를 갖고 다니게 된 것도 순전히 아이때문이다. 〈인기가요 20〉을 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딸아이의 모습 정도는, 귀여울 수 있다. 저러다 지치겠지, 하는 심정도 있고 우리세대가 중학교때 팝송에 미쳤던 점을 생각하면, 요즘 아이들은 좀 빠른 거겠지,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멋진 만남〉의 '청춘의 찜'같은 코너를 보면서 키득대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면 솔직히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걱정이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어울리지도 않거니와(당연히!), 부모로서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속으로 안절부절대면서도 선뜻 아이의 눈과 귀를 막지는 못한다. 평소에 하지 않다 때늦게 TV시청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자칫 역효과만 내겠다 싶은, 판단때문이다.

요즘들어 이상하게도 남자와 여자를 소개시켜주는, 일종의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많다. 생전 처음보는 남녀가 스튜디오에 나와서 장기자랑을 한다며 몸을 흔들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마치, 내 몸값은 얼마요, 하는 것 같다. 대부분 여자가 남자를 선택하게 하는데, 그에 앞서 남자들에 대한 선택 기준이 방송을 통해 제시된다. 직장은 어디이고, 키는 얼마,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등등. 이건, 방송인지 중매쟁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다. 어떻게 이런 행위가 젊은 남녀의 건전한 만남을 유도한다는 것인지, 그 당찬 마인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간다. '청춘의 찜'같은 코너는 아예 여자가 남자를 '찍어 놓고', 방송을 통해 그 남자를 공개한다. '이 남자는 내것!'이라는 식이다. 스튜디오에 나와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연출이 가미된 것이긴 해도, 영문도 모르면서 팔려가는 노예를 생각나게 한다.

케이블TV협회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성인남녀의 대부분이 플레이보이같은 성인채널이 신설되기를 원한다고 한다. 국내 TV시청가구 중 케이블TV를 보는 가구가 약 140만이라고 하니, 이 조사가 전국 시청자의 취향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요즘의 성인문화의 한 흐름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케이블TV를 통해 볼 수 있는 성인프로그램이라면 유료채널인 '캐치 원'에서 심야시간대에 방송하는 〈에로틱 무비 시리즈〉정도 같다. 여자의 가슴, 후면 누드가 나오니 TV프로그램치고는 매우 야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종합유선방송위원회에서는 '캐치 원'에 이 프로그램의 방송 중단을 요청한 상태라고 한다. 협회의 조사 결과를 놓고 볼 때 케이블TV 시청자들의 마음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조처라는 볼 멘 소리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성인채널의 신설은 우리사회에서는 아직 요원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청춘의 찜' 같은 프로그램이 문제라면서 〈에로틱 무비〉는 괜찮지 않느냐는 얘기는 일견, 매우 모순된 발언일 수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는데 미디어 정책과 아이들을 위한 미디오 교육의 올바른 방향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야말로 방송 프로그램 제작자나 정책입안자, 수용자들이 미디어의 차별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공중파TV와 케이블TV, 위성방송 등 다매체의 시대앞에서 어떤 매체에 어떤 프로그램들이 배치돼야 하는 가에 대해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아이들은 성과 폭력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반면, 성인들은 TV프로그램들이 항상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난잡하고 요란한 오락프로그램들을 만들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프로그램들은 선택적인 매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이른바 무차별 전파매체라는 공중파TV에서 수십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방송하고, 미스코리아에다 슈퍼모델 대회까지 방송하며, 연예인들을 스카이다이빙에 번지점프까지 시키면서 혹사시키는 것이, 과연 이 시대의 제대로 된 방송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많은 성인들은 아이들과 함께 '세계의 박물관'이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고 싶어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이 자고 난후에는 아내와 함께, 또 어떤 이는 애인과 함께, '에로틱한' 프로그램을 보고싶어한다고도 믿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통제하기 보다 TV를 통제하기를 원하며, TV의 공격앞에 아이들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쉽게 좌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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