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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거사’ 안상수 주도, 홍준표·정두언·서병수 가세…청와대 “보온병에 한 방 맞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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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나라당 안상수(오른쪽) 대표와 홍준표 최고위원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김형수 기자]


한나라, 갑자기 왜

장관(급)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10일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에게 사퇴를 촉구한 것이 여당발 ‘거사(擧事)’로 규정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이번 ‘거사’는 안상수 대표의 주도 아래 친이계의 홍준표·정두언 최고위원, 친박계 서병수 최고위원의 ‘합작’으로 진행됐다.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안 대표는 “주말에 지역구를 다녀봤는데, 상황이 매우 나쁘다”며 정 후보자 문제를 의제로 꺼냈다. 그러면서 최고위원들에게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 그러자 홍준표·정두언·서병수 최고위원 등이 강경론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들은 “당이 정 후보자 사퇴를 요구하지 않으면 개인 성명을 내겠다”고까지 했다 한다. 그러자 안 대표는 정 후보자 사퇴를 ‘만장일치의 당 지도부 의견’으로 공식화해 버렸다. 한나라당은 지난해 연말 예산안의 단독 처리 이후 ‘당 중심의 국정운영’을 천명해 왔다. 청와대와의 관계를 보다 수평적 으로 바꾸겠다고 한 것이다. 이런 입장을 당 지도부가 실행에 옮긴 셈이다. 원희룡 사무총장은 "인준 투표일에 닥쳐올 (부결) 상황이 국정 수행에 더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감사원장 인준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로 통과돼야 한다.

 여당의 거사는 가까이는 4월 국회의원 재·보선, 멀리는 내년 총선·대선을 염두에 둔 포석이다. 정두언 최고위원은 회의 후 “청와대는 아무 생각 없이 (인사를) 하지만 이런 일이 당에 엄청난 피해를 준다”며 “선거가 점점 눈앞에 다가오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정진섭 기획본부장은 “한나라당이 과거 노무현 캠프 자문교수 출신인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자의 독립성 문제를 시비 삼아 그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적이 있었다”라며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정동기 후보자의 경우는 윤씨보다 더 원천적인 배제 사유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 소속 청문위원회의에서 반발이 터져나올 것이란 보고를 안 대표가 받고 선수를 쳤다는 관측도 나온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인사청문회에서 논문 표절 문제가 불거졌음에도 노 대통령의 임명 강행으로 부총리직에 오른 김병준 교육부 장관에게 자진사퇴를 요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처럼 인사청문회도 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제동을 건 적은 없다. 당시 김 부총리는 여당 지도부의 사퇴 요구가 있은 지 하루 뒤 물러났다. 이런 사례를 아는 한나라당에서도 정 후보자가 곧 사퇴할 걸로 보고 있다.

 안 대표는 최고위원회의 후 ‘거사’의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에 “노 코멘트다. 노 코멘트”라며 답변을 피했다.

글=강민석·허진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발칵 뒤집힌 청와대

10일 오전 10시쯤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는 ‘한나라당의 거사’ 소식이 전해지자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다. 지난 주말을 계기로 “버티기가 쉽지 않겠다”는 우려가 청와대 내부에서 커지긴 했지만 한나라당이 청와대와 사전 조율 없이 사퇴 촉구 카드를 꺼내 들 걸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참모들 사이에선 “여당이 청와대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안상수 대표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북한의 포격을 받은 연평도를 방문해 ‘보온병 포탄’ 발언을 한 안 대표를 겨냥해 “보온병에 한 방 맞았다”며 분통을 터뜨린 이도 있었다.

 한나라당이 입장을 발표하던 시각 청와대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정진석 정무수석은 “급하게 연락을 달라”고 메모를 남긴 원희룡 한나라당 사무총장과의 통화에서 최고위원회의 결과를 ‘통보’받았다. 깜짝 놀란 정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이 대통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 대통령의 표정은 매우 굳어 있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이후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일부 수석들이 따로 모여 대응책을 논의했다.

 오후 4시40분쯤 홍상표 홍보수석이 춘추관(기자실)을 찾았다. 그는 “책임 있는 집권 여당으로서 이번에 보여준 절차와 방식에 대해서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거사와 반란’이 매우 불쾌하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중앙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냐.

 “안상수 대표가 주도한 것이다. (보온병 발언 등으로) 망가진 이미지를 개선해 보기 위해 그런 것 같다.”

 -청와대는 사전에 몰랐나.

 “몰랐다. 우리와 상의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책임 있는 여당이 그럴 수 있느냐. 이러면서 청와대보고 소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

 -대통령 반응은.

 “단 한 말씀도 안 하더라. 대통령의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청와대의 불쾌지수가 높은 건 한나라당의 ‘거사’로 집권 4년차를 맞은 이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걱정하기 때문이다. 한 참모는 “대통령의 인사에 여당이 정면 반발하고, 그 때문에 인사가 좌절된다면 대통령이 가장 경계해 온 임기 말 레임덕(권력누수)이 촉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입장을 밝힘에 따라 청와대가 ‘정동기 카드’를 끝까지 고수하기 어렵게 됐다. 홍 수석은 “청와대가 유감을 표명하는 것은 당이 의견을 밝힌 ‘방법’과 ‘절차’”라며 “당의 요구를 수용할지, 말지를 말할 단계는 아직 아니다”라고 했다. 여당의 방식은 못마땅하지만 ‘정 후보자 사퇴’는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주변의 관측이다.

 청와대 안팎에선 ‘정동기 카드’를 밀어붙인 참모들의 책임론도 거론된다. ‘청와대 민정수석 출신이 감사원장을 맡는 게 적절한가’라는 문제에다 ‘7개월간 7억원에 달하는 로펌 수입과 전관예우’ 등이 내부 청문과정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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