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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죽겠는데 생일 선물도 없이 체육하라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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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호 03면

201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일의 김정은. 이날 평양에선 창건 기념 대규모 열병식이 있었는데 그는 이 표정으로 열병을 지켜봤다. AP=연합뉴스

“생일이라며 주는 것(선물)도 없고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체육경기를 하라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 자리를 굳혀 가는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 오전 10시쯤 북한 북부 중국과의 접경 지역에 있는 회령시에서 전화가 왔다. 김철호씨. 약속된 통화다. 통화를 위해 김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며 모처로 이동했다. 추운지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8일 김정은 생일, 휴대전화로 알아본 북한 표정

-그래, 선물은 받았나.
“생일이라면서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다.”

-김정은 생일인데 아무것도 안 주나.
“김정은 생일이라고 충성의 노래 모임을 시키고 이 추운 날씨에 체육경기까지 조직하고 있다. 흥이 나면 체육도 재미가 있을 텐데 억지로 하자니 온몸이 시려 견디기 힘들다.” 그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1분 남짓한 짧은 통화였다.

2010년 2월 3일, 조선중앙TV는 전국 학생들의 ‘광복의 천리길 답사 행군’에 날아든 김정일 위원장의 선물을 방송했다. 사진 위는 선물을 실은 헬리콥터를 환영하는 인파. 가운데는 헬리콥터에서 내려진 선물. 혜산외국어학원학생 류효심은 “선물은 맛 좋고 신선한 과일과 고급 당과류”였다고 말했다. 아래사진은 선물을 하나씩 챙기고 도열한 학생들.

통일부는 지난해에도 내부적으로 노래모임이나 체육행사 등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권력 구축 상황이 지난해와 비슷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올해는 특히 김정은이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란 공식 직책을 가진 이후 첫해이기 때문에 주목받았다.
지도자 생일의 관례에 따라 선물이 나오면 그는 ‘확고한’ 지도자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아니면 아직 ‘후계작업 중’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의 생일이 공식 기념일이나 휴일인지는 엇갈린다. 통일부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가 지난해 12월 말 발간한 ‘연례 정세전망 보고서’에서 ‘2010년 김정은 생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고 소개했다.

사실 ‘김정은 생일에 아무것도 없다’는 점은 이미 지난주부터 예견됐던 것이다.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주민은 5일 통화에서 “언제 당에서 우리 백성들에게 텔레비 한 대 줬나? 난 메뚜기장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장사해 그래도 강냉이밥이라도 배불리 먹고 합영텔레비(중국산 흑백텔레비전)라도 해놨지. 차라리 장사라도 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6일엔 무산의 한 주민과 통화했다. 그는 “까딱(일체) 소식 없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젠 먹을 알(것)도 없는 선물보다 장사해 버는 게 먹고사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했다.

7일 통화한 간부급 한 주민은 “지난해에는 장군님 탄생일(김정일 생일·2월 16일)에 간부들한테 선물을 줬다. 그런데 올해 김정은 동지 탄생일에는 뭐 준다는 소식이 없다. 백성들 줄 쌀은 없어도 간부들 줄 선물은 있었는데… 내일 봐야 알겠지만 안 줄 것 같다”고 했었다.

북의 형편이 괜찮았던 시절, 고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이면 며칠 전부터 시나 군 등의 인민위원회에 선물 트럭이 줄을 섰다. 그래서 선물을 주는 것을 미리 알았다. 선물은 당일날 나눠 줬다. 그런데 이번엔 선물 트럭이 아예 없었다. 8일 오전에도 없었다.

그런데 의외로 무산에서는 선물이 있었다는 대북 NGO의 소식이 전해졌다. 무산광산 노동자들에게 1월 5~6일 김정은의 생일 선물이 공급됐다고 홈페이지에 띄웠다. 노동자들에게 설탕 1㎏, 기름 1㎏, 청어 1㎏을 주고 가정이 있는 남자들에겐 그릇세트(밥ㆍ국그릇 각 한 개)와 수저세트를 줬다는 것이다. 무산의 주민은 “광산에 투자한 중국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선물은 통치의 도구다. 한국에선 선물이 ‘남에게 주는 물건’ 정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김일성ㆍ김정일 부자의 하사품 외에는 이 단어를 쓸 수 없다.‘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제6조 4항에 ‘개별적 사람들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현상을 철저히 없애야 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선물 종류는 다양하다. 전체 주민들이 선물을 받는 명절은 김일성 생일(4월 15일), 김정일 생일(2월 16일), 김정숙 생일(12월 24일), 1월 1일, 인민군 창건절(4월 25일), 국경절(9월 9일), 당 창건절(10월 10일)이다.

김일성 생일 선물은 1976년 시작됐다. 주민들에겐 식료품이 선물로 나왔다. 학생들에겐 2년에 한 번씩 교복, 반소매셔츠, 모자, 소년단 넥타이, 신발을 줬고 생일 당일에는 사탕, 과자, 단묵(젤), 껌을 줬다. 선물은 ‘증정식’을 통해 전달된다. 선물은 평양과 지방에 차이가 있었다.
평양에는 중학생까지, 지방엔 인민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줬다.

82년 김 주석 60회 생일 때는 솜옷과 담요가 나왔다. 김정일도 같은 해 82년에 식료품을 준 것으로 생일 선물을 시작했다고 탈북자 정유리(가명·45)씨는 말했다. 당 창건 50년, 55년 같은 소위 ‘정주년’엔 김일성ㆍ김정일의 이름이 동시에 적힌 선물도 제공됐다.

보통 명절 때는 돼지고기·계란·술·두부·콩나물 같은 식료품이 선물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무료였다 나중엔 적지만 돈을 냈다. 예를 들어 2004년의 경우 돼지고기 1㎏이 상점에선 1800원이었는데 ㎏당 200원으로 싸게 받는 식이었다.

간부는 1년에 3~4회 선물을 받았다. 고위 간부는 공산품과 식료품을 받았다. 공산품은 수입산 롤렉스 시계, 양복, 외투, 가방, 컬러TV, 냉장고, 세탁기 같은 것이었다. 식료품은 사슴이나 노루 한 마리, 꿩, 고급 양주, 귤, 북한산 고급 술, 맥주 수십 병 같은 것들이다. 선물들은 트렁크에 넣고 겉을 다시 박스로 포장한다. 그 위에 ‘김일성의 선물’이나 ‘김정일의 선물’이라고 썼다.

나름 푸짐하던 선물은 80년대 중반 이후 확 줄었다. 가구당 선물도 한 번에 돼지고기 500g, 두부 한 모, 술 한 병, 콩나물 1㎏ 정도였다. 전에는 종류도 더 많고 양도 훨씬 푸짐했다. 그러면서 선물에 대한 주민의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국가안전보위부에 근무했던 평양 출신 탈북자 오상민(가명·46)씨는 “평양 주민이 끼리끼리 선물이 당과 수령이 공짜로 인민들에게 주는 것인지, 전 인민의 봄 40일과 가을 20일에 농촌에 무보수로 동원되는 대가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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