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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데치면 꼬막이 품은 싱싱한 갯냄새 물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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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호 10면

일반적으로 조개의 제철은 봄이다. 바지락을 비롯한 상당수의 조개가 5월 무렵 통통하게 제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겨울에만 제맛을 내는 조개가 있다. 꼬막과 홍합이 대표적이다. 꼬막이란 말을 듣는 즉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소설 속의 벌교 꼬막 이야기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잘난 사회주의자 형을 둔 망나니 동생 염상구는, 예쁘게 생긴 여자만 보면 “솔찮여” 하고 입맛을 다시기 시작해(이 대목에서 음한 기운의 회갈색 눈동자를 가진 배우 김갑수가 떠오르는 사람도 꽤 있으리라), 결국 쫀득한 ‘겨울 꼬막 맛’으로 그 엽색행각을 끝내고야 만다. 꼬막 먹으러 전남 보성군 벌교를 찾아가거나 ‘벌교’를 앞세운 꼬막 전문점을 찾아가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그 ‘겨울 꼬막 맛’이란 표현의 관능적 이미지를 지우기란 참으로 힘들 것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43> 겨울 꼬막과 홍합

꼬막은 씻고 삶는 것이 일의 전부다. 개펄에서 사는 꼬막은 온통 뻘 흙투성이다. 물에 넣고 여러 번 씻어야 한다. 씻으면서 뻘 흙만 차 있는 빈 꼬막도 골라내야 한다. 삶는 것은 더 중요하다. 물을 팔팔 끓여 꼬막을 넣고 휘휘 몇 번 저은 후 꺼내는데, 조개가 입을 벌리면 벌써 늦은 것이다. 그래도 성질 급한 조개 몇 마리가 입을 벌렸을 터인데, 그걸 먹어보면 너무 익어 질기고 맛이 상당 부분 빠져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입을 벌리지 않은 꼬막은, 껍데기를 깐 후에도 속살이 그리 많이 줄어들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촉촉하고 반드르르하다. 바로 그 상태가 가장 맛있게 삶아진 것이다.

꼬막 까는 법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숟가락을 누룽지 긁을 때처럼 잡고, 꼬막 뒤편 양쪽 껍데기가 볼록 튀어나와 있는 사이에 숟가락을 넣어 돌리면 ‘딸깍’ 하고 껍데기 한쪽이 떨어져 나간다. 껍데기를 한쪽만 떼어 양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념간장은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과 공장제 간장을 섞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조개는 그 자체로 상당한 소금기를 머금고 있으므로 간을 짜지 않게 해야 한다. 고춧가루·파·마늘·깨소금을 넣고 양념간장을 만들어 무친, 쫀득하고 짭조름하며 싱싱한 갯냄새가 풍기는 꼬막 맛은 정말 기막히다.

벌교의 식당에 가서 꼬막을 주문하면, 그냥 양푼 하나 가득 삶은 꼬막을 갖다준단다. 그냥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까먹는 가장 원시적인 음식인데, 그것이야말로 가장 맛있는 꼬막 맛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벌교에서 이 꼬막 맛은 보지 못했다. 겨울마다 벼르기만 할 뿐이다.
꼬막이 맛은 있지만 값은 ‘솔찮은’ 게 흠이다. 그저 서민들이 망설이지 않고 시장에서 사올 수 있는 겨울 조개는 홍합이다. ㎏당 2000원 정도인데 껍데기까지 얇으니 양으로 보자면 꼬막의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예전부터 포장마차에서 그저 공짜로 국물을 퍼줄 수 있었을 것이다. 추운 겨울밤 포장마차 안에서, 까만 홍합 껍데기로 국물을 훌훌 퍼 마시던 추억은 누구나 있으리라.

홍합은 꼬막에 비해 씻기도 편하다. 예전에는 지저분한 상태로 팔았지만, 요즘은 꽤 깨끗하게 세척해 판다. 하나씩 상태를 봐 가며 두어 번 정도 씻으면 깨끗하다.
홍합만 끓여 마늘과 소금을 넣고 국 삼아 먹는 것은 누구나 먹는 방식이니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홍합의 매력은 어느 조개보다도 달착지근한 국물 맛이다. 조개 국물이 어찌 이리도 달착지근할 수 있을까. 홍합 국물에 물미역을 넣어 살짝 끓인 미역국은, 한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싱싱한 별미 미역국이다.

칼국수나 콩나물국을 끓일 때 홍합을 넣어도 그 맛은 기막히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고 감칠맛 나는 콩나물국을 끓이는 가장 편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홍합을 넣는 것이다. 이 경우 푹 끓이게 되므로 홍합 살은 맛이 없어지지만 콩나물과 함께 깊은 맛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홍합으로 별미 음식을 해 먹기 시작했는데 아주 성공적이다. 전골냄비나 팬을 달궈 버터를 녹이고, 여기에 홍합을 껍데기째 넣어 볶는다. 홍합은 가열되면서 입을 조금씩 벌리기 시작하는데, 이때 와인이나 청주를 뿌려 비린내를 잡는다. 그리고 마늘을 넣고 휘저어 뚜껑을 닫고 익힌다. 모든 조개가 그러하듯, 조개 육질을 즐기려면 살짝 익혀야 한다. 흐물흐물해 보이던 홍합 살이 약간 줄어들면서 익은 듯 보이면 후춧가루를 뿌리고 모든 과정이 끝난다. 조리시간은 5∼6분 정도이니 초스피드 요리라 할 만하다. 소금은 넣지 않아도 간이 꽤 센 편이다. 홍합 자체의 소금기가 꽤 있는데, 여기에 버터의 소금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우묵한 접시에 담아 놓으면 양식당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한 요리처럼 꽤 그럴듯해 보인다. 달착지근한 홍합에 고소한 버터 향이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서양요리에서 홍합을 즐겨 쓰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이를 응용해 스파게티 국수를 삶아 볶은 후, 홍합 볶은 것과 섞어 다시 한 번 볶아 내놓으면 훌륭한 와인스파게티를 만들 수도 있다. 토마토소스에 비해 훨씬 간편한 방식이다.
이외에도 홍합에 버터를 넣어 팬이나 오븐에 굽는 요리는 더 멋져 보이지만, 훨씬 손이 많이 가는 것이 흠이다. 출출한 저녁에 밥보다 와인이나 맥주 한잔이 더 당기는 날엔, 이 편한 음식 한 접시 뚝딱 해놓으면 어찌나 뿌듯한지. 구운 빵을 곁들여 남은 국물에 찍어 먹으면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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