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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선수 하루 1000개 쳤다는데 저는 볼 2000개 친 적도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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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김비오가 턱시도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포즈를 취했다. 2번 아이언이 가장 자신 있다는 그는 “PGA투어에서 타이거 우즈를 만나도 떨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Q스쿨에서 캐디를 했던 미국인 친구 실버맨과 PGA 투어 정복에 나선다. [김상선 기자]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세계 골프의 중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키 1m83㎝, 몸무게 80㎏의 스물한 살 청년 김비오(넥슨)입니다. 지난해 퀄리파잉스쿨(Q스쿨)을 공동 11위로 통과해 한국인으로선 역대 최연소 PGA 투어 정규 멤버가 됐죠. 그가 오는 14일(한국시간) 미국 하와이에서 펼쳐지는 PGA 투어 소니오픈에서 데뷔전을 치릅니다. 이번주 golf&은 PGA 투어 정복에 나서는 김비오의 ‘골프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제 큰 산 하나 넘었다/그 뒤에는 더 큰 산이 날 기다리고 있는데/이 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숨 쉬기보단/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올라가는 내가 되었으면/그만큼 즐기며 배우며 투어생활을 했으면 좋겠다/상쾌한 출발~.”

김비오가 Q스쿨을 통과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7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글이다. 당당하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읽히는 문구다. 약관의 나이인 스무 살에 PGA 투어 진출의 꿈을 이룬 김비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가 남긴 글은 어른스럽기 짝이 없다.

21세에 PGA 투어 입성 … 한국인 역대 최연소

“1차 목표는 일단 PGA 투어카드를 유지하는 것이죠. 상금 랭킹 125위 안에 드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뭐든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갈 생각이에요.”

태국에서 열흘간의 전지훈련을 끝마치고 4일 새벽 귀국한 김비오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했다.

김비오는 “9일 미국 하와이로 출발한다. 마음이 많이 설렌다. 내가 골프를 하면서 항상 꿈꾸던 그 무대로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꿈은 당차기 짝이 없다. 세계 최정상에 서는 것, ‘넘버1’의 꿈이다.

“지금은 햇병아리죠. 시작은 누구나 미약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어요. 타이거 우즈처럼 오랜 시간 군림은 못할지 몰라도 세계 1위가 불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재로선 그가 올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가 내딛는 발걸음엔 모두 ‘한국인 최연소’란 타이틀이 붙는다. 물론 PGA투어 벽은 높다.

김비오는 경력이 화려한 편이다. 유학을 마치고 2006년 국내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년 만인 2007년 태극마크(국가대표)를 달았다. 2008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아마추어 주니어 선수권을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지난해 조니워커 오픈에서 만 19세11개월19일의 나이로 정상에 올라 한국프로골프투어(KGT) 최연소 챔피언 기록을 세웠다.

초등 4학년 때 “골프 안해” … 필드 나간 뒤 마음 바꿔

“골프는 내 삶이죠. 나를 골프의 세계로 이끈 박세리 선수가 하루 1000개의 볼을 쳤다고 하는데 저는 하루에 2000개의 볼을 치기도 했어요.”

김비오는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고 골프 선수의 꿈을 키웠다. 박세리가 우승한 이듬해인 1999년 초등학교 3학년 때 골프에 입문했다.

다른 선수들이 그렇듯 그도 아버지 김승국(48)씨의 권유로 골프클럽을 처음 잡았다. 김비오는 1년 정도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을 다녔다. 그러나 4학년이 되면서 “골프를 그만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골프를 그만두겠다고 하기에 서울 구파발에 있는 6홀짜리 퍼블릭 골프장에 처음으로 (김)비오를 데리고 갔어요. 골프를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죠. 필드를 처음 경험하게 된 겁니다. 비오는 그때 골프에 푹 빠지고 말았어요.”

아버지 김승국씨의 얘기다. 골프를 그만두려다 오히려 골프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김비오. 아버지 김씨는 그날 이후 아들에게 연습을 강요하지 않았다. 필드 맛을 본 김비오가 스스로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빠로서 아들에게 할 얘기는 아니지만 ‘비오는 한마디로 골프에 미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회상하는 2년 전 김비오의 모습은 이랬다. 스윙이 망가져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의 일이다. 김씨는 매일 새벽같이 집을 나가 오후 9시가 넘어 파김치가 돼 돌아오는 아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하루는 참다 못해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아들의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아침 6시에 집에서 나가 무조건 하루 2000개의 볼을 치고 있어요. 점심 먹는 시간 10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 내내 볼만 치면 저녁 8~9시쯤은 돼야 그 볼을 다 칠 수 있더라고요. 일주일쯤 됐는데 이제야 잃어버렸던 스윙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김비오는 “예전의 스윙 감각을 잃어버린 뒤 스스로 진단과 처방을 내렸다”고 말했다. 스스로 문제점을 찾았다는 것이다. 김비오는 김대현처럼 320야드의 폭발적인 드라이브 샷을 구사하는 장타자는 아니다. ‘탱크’ 최경주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선수도 아니다. 하지만 ‘몰입의 골프’, 즉 ‘집중력’만큼은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캐디 팀 실버맨은 골프유학 가서 만난 친구

그에겐 미국인 친구가 한 명 있다. 팀 실버맨(25)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년간 가족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어바인(Irvine)에서 골프 유학을 할 때 만나 친구가 됐다. 나이로는 형이지만 바로 그 친구가 지난해 Q스쿨에서 캐디를 했다. 실버맨의 핸디캡은 5 정도다. 김비오는 Q스쿨을 치르러 혼자 미국으로 날아간 뒤 이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팀은 Q스쿨 통과의 1등 공신이죠. 예전에 아버지가 캐디를 할 때보다 심리적으로 더 편했어요. 아버지는 내가 ‘보기’를 하면 자꾸 스윙 얘기를 꺼내지만 친구나 후배가 백을 메면 우린 전혀 다른 얘기를 해요. Q스쿨 마지막 날에 치명적인 ‘더블보기’가 나왔어요. 하지만 팀은 나에게 다른 얘기를 했어요. 예전에 함께 라운드를 하면서 즐거웠던 상황을 떠올려 줬어요. 그 친구는 나를 잘 알아요. 그 점이 좋아요.”

그래서 김비오는 PGA 투어 첫해 친구 실버맨에게 캐디를 맡길 예정이다. 소니오픈 때부터 함께 PGA 투어 정복에 나선다. 두 사람은 Q스쿨 때 이런 얘기를 했다.

“왜 겨우 6라운드로 승부를 가리지?”

“10라운드를 하면 우리가 1등을 할 수 있을 텐데….”

부정맥으로 수술 받기도 … 노래 실력도 프로급

김비오가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만은 아니다. 첫째는 그가 만성 심장질환인 ‘부정맥’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한 차례 수술을 해 호전되긴 했지만 몹시 힘이 들 때나 긴장할 경우 호흡 장애를 일으킨다. 2009년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골프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정말 골프 클럽을 놓고 싶었어요. 한국과 일본에서 20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컷을 통과한 것이 고작 2개 대회뿐이었죠.”

김비오는 훈련과 노래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털어놨다. 골프 선수가 안 됐으면 가수가 됐을 거라는 그는 “마스터스의 그린 재킷이 눈에 밟혀 골프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가수 아이유의 ‘좋은 날’을 열창할 수 있고, 흘러간 옛 노래부터 최신 발라드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다는 이 청년. 김비오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골프 색깔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글=최창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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