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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박태준·근로자, 무쇠 영웅들 … ‘민족 고로’는 37년간 쉬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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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70년 4월 1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1고로는 착공한 지 3년2개월 만 인 73년 6월 9일 첫 쇳물을 생산했다. [포스코 제공]

지난해 12월 23일 오후 2시 포스코 경북 포항제철소 제1고로. 30층 빌딩(110m) 높이의 1고로는 겉에서 보기엔 가동을 멈춘 공장 같았다. 높이 솟은 굴뚝은 검게 그을었고, 공장 곳곳의 철판은 녹슬어 있었다. 굴뚝에서 쉼 없이 내뿜는 수증기만이 이 공장이 숨쉰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고로 안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덮쳤다. 고로 중앙의 출선구에서 붉은색 쇳물이 콸콸 뿜어나오고 있었다. 쇳물의 온도는 1510도. 우주복을 닮은 은색 방열복 차림의 직원만 말 없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1975년 입사한 양근배 1고로 조업파트장은 “제철소의 심장은 쇳물을 만드는 고로”라며 “1고로는 세운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쇳물을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포항제철소의 심장은 그렇게 뛰고 있었다.

 ◆1973년 6월 9일 ‘철의 날’=포스코 포항제철소 제1고로는 한국 철강의 국보다. 한국 정부가 철강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회사 설립 계획을 세운 것은 58년 이승만 정부 시절. 하지만 이 계획은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을 이유로 다섯 차례나 무산됐다.

 계획을 본격화한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63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부터다. 박 대통령은 철강산업이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필수 산업이라고 생각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1년)에는 일관제철소 건설을 핵심 과제로 포함했다. 대외의존형 경제를 수출 위주의 자립형 경제 체질로 바꾸기 위해선 철강사를 세우는 것이 필수라고 판단한 것이다.

 70년 4월 경북 영일군 동촌동에서 포항종합제철 공장 1기를 착공했다. 당시로선 최대 규모의 단일 투자 공사였다. 국내 자본 493억원과 외국 자본 711억원(총 1204억원)을 투자했다. 연인원 315만4884명이 공사에 투입됐다.

 착공 후 3년2개월 만인 73년 6월 8일 드디어 국내 최초의 용광로인 1고로를 준공했다. 다음날 고로에서 쇳물이 터져나오자 이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당시 사장)과 직원들은 만세를 불렀다.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었다. ‘철의 날’(6월 9일)은 1고로에서 쇳물이 나온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고로는 쇳물을 만들어내는 용광로다. 쇳물은 철광석을 코크스·석회석과 함께 넣고 1500도의 열풍으로 가열해 만든다. 하루 수천t의 쇳물을 뽑아내는 대형 설비다. 제철소의 핵심이다. 포스코 직원들은 철강 주도권을 갖는 계기가 됐다는 뜻에서 1고로를 ‘민족 고로’라고 부른다. 60년대만 해도 1차산업 위주였던 한국이 비로소 근대적 공업국가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됐다.

 ◆모두가 영웅이었다=1고로 건설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68년 세계은행(IBRD)과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한국에서 제철사업은 시기상조란 내용의 보고서를 내 찬물을 끼얹었다. 원료 공급, 기술 이전도 막막했다.

 어려움을 뚫는 데는 박태준 사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제철소 건설이 실패할 경우 오른쪽으로 돌아 동해 바다에 몸을 던지자는 뜻의 ‘우향우 정신’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을 갈아 신었을 정도로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격려했다. 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사무직 사원까지 현장에 투입했다. 80%까지 공사를 진행한 발전설비가 부실로 밝혀지자 단번에 폭파할 정도의 뚝심도 보였다.

 그의 리더십은 해외에서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78년 덩샤오핑 중국 국가주석이 일본 기미쓰 제철소를 방문해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중국에도 지어 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고 답한 일화도 있다.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도 큰 힘이 됐다. 65년 미국의 존슨 대통령과 만나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기술 지원을 요청하는 등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뛰었다. 68년부터 11년 동안 현장을 13차례 방문해 격려했다. 또 박 사장이 정치권의 압력을 배제하고 설비 공급자 재량권을 갖게 해달라고 건의한 메모를 보내자 친필로 사인한 ‘종이 마패’를 건네 힘을 실어줬다.

 밤낮없이 주 7일 12시간 2교대로 일한 직원들의 열정도 빛났다. 전국 각지에서 ‘잘살아 보자’는 일념으로 모인 사내들은 영일만 앞바다에서 밤낮없이 불어오는 모진 모래바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당시 동력부에서 일한 강봉기(67)씨는 “현장에 건물이 따로 없어 허허벌판에서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며 “밥에 모래가 쌓이면 물을 부어 가라앉힌 다음 먹곤 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깡’으로 일했다. 밤을 새우는 철야작업을 밥 먹듯 했다. 깜깜한 새벽에 공장 불빛 아래 모여 축구를 했다. 강씨는 “피곤하니까 축 늘어지기 쉬운데 기운내자며 축구를 했던 것”이라며 “한바탕 땀을 흘리고 다시 기운을 내 일하곤 했다”고 말했다. 주로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일했던 이들을 포항시민들은 ‘노란 군대’라고 불렀다. 그들 모두가 한국 경제 근대화의 ‘이름 없는 영웅’이었다. 모두가 반대했던 일, 1고로 탄생은 무쇠 같은 남자들이 만들어낸 한 편의 드라마였다.

  포항=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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