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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최측근 - 박정희 친필 제작 … 광화문 현판 보면 권력이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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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866년 고종 중건 당시 임태영의 글씨로 쓴 현판(위). 현재의 현판은 이를 토대로 복원했다.

문화재청이 금이 간 광화문 현판을 결국 새로 만들어 걸기로 했다. 복원 3개월 만이다. 문화재 당국은 균열 원인으로 목재·조립 부실 등을 들었다.

 사람들은 경복궁이든 어디든 기둥이나 보 따위에 금이 간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광화문 현판의 경우는 다르다. 현판은 광화문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현판을 새로 만들어 다는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광화문 현판에는 조선왕조 건립 이후 600년 정치권력의 역학이 담겨 있다. 통치의 상징물인 것이다.

 우선 현판의 글자 ‘광화(光化)’에는 왕조의 통치이념이 담겼다. 태조 창건 당시엔 ‘정문(正門)’이라 불렸으나 세종대에 집현전 학자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는 이름을 지어 올렸다. 중국 고전 『서경(書經)』의 ‘광피사표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온 것으로 ‘(군주의)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친다’는 의미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 1968년 제막식 당시의 필체(사진 위)와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의 필체가 다르다. [문화재청 제공]

 현재 광화문 현판 글씨는 1866년 고종 중건 당시 영건도감(營建都監·국가적 건축공사를 관장하는 임시관청)의 제조(提調·책임자)로 임명됐던 무관 임태영(훈련대장, 1791~1868)이 쓴 것을 디지털로 복원한 것이다. 고종 중건 당시를 경복궁 복원의 기준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은 최측근이었던 임태영을 영건도감 요직에 앉히는 등 경복궁 중건을 권력행사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는 조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는 듯 경복궁 전각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다. 그럼에도 광화문은 여론의 반대가 워낙 거세 헐지 못하고 건춘문 옆으로 옮겨 놓는다. 그것이 6·25전쟁 때 피폭을 당해 현판도 소실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철근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복원하고 친필 한글 현판을 단다. 한글 현판은 민족·자주의 상징이었다. 공교롭게도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도 두 번 제작됐다. 경복궁 관리소 장재혁 주무관은 “현판 제막식 때의 필체와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의 필체가 다른데, 언제 어떤 이유에서 바뀌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올해 한자로 복원된 광화문 현판은 우리 역사를 되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 광복절 경축식을 광화문광장에서 열면서 현판 제막식도 함께했다. 그러나 복원의 꽃인 현판에 금이 가자 8·15 행사에 맞춰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한 결과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문화재청은 자체 감사 결과 판재로 쓴 목재와 조립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사실상 장인들에게 책임을 돌린 셈이다.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좋지 않은 나무가 왔다면 감리단이 걸러냈어야 한다. 광복절 경축식에 맞춰 급하게 작업했다는 것을 가리기에 급급한 해명”이라고 주장했다. 문화재청 김원기 궁능문화재과장은 “감리단이 제대로 못했다는 지적을 인정한다. 죽도록 고생해 경복궁을 복원한 여러분들이 광화문 때문에 표창도 못 받는 것이 시행 책임자로서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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