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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포용의 종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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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소영
도쿄 특파원

12월이 되면 도쿄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뜬다. 밤이 되면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이 거리 곳곳을 휘황찬란하게 장식하고, 가족·친구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는 쇼핑객들로 거리가 북적댄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한 달 전부터 제과점과 편의점에서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예약이 시작된다. 1500년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들어와 일본인 신자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 기록을 보면 일본의 크리스마스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1800년대 말부터 백화점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도입됐고, 1900년대 초부터 각 가정에서 이날을 축하했다. 1909년 12월 15일자 요미우리(讀賣)신문에는 “일본에서도 최근 크리스마스가 각 가정의 가장 큰 연례행사가 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독교가 ‘적성(敵性) 종교’라는 이유로 일본 전역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이 금지됐지만 전쟁이 끝나자 가장 먼저 부활한 게 크리스마스 문화였다.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1% 미만이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인은 크리스마스 파티(기독교)를 하고 12월 31일에는 제야의 종(불교)을 울린다. 새해 이른 아침엔 신사를 참배하고(신도·神道), 아이들에게 세뱃돈(유교)을 준다. 또 죽어서는 불교식 장례를 치르는 게 일반적이다. 과거 일본을 찾은 무역상이나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의 이 같은 종교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성공회의 홍콩주교였던 조지 스미스는 1860년 일본을 방문, 나가사키의 한 사찰에 머물게 됐다. 그가 십자가를 놓을 넓을 방을 부탁하자, 주지는 흔쾌히 불상을 치우고 가장 큰 방을 손님에게 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종 ‘일본인들은 종교관이 흐리다’ ‘잡탕 종교국’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본인 특유의 포용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종교행사가 많은 일본이지만 정교(政敎)분리의 원칙만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석가탄신일과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닌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본은 국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규정한 메이지 헌법을 패전 후 개정한 역사를 갖고 있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와 그의 손자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가톨릭) 등 특정 종교를 갖고 있는 정치인 그 누구도 종교색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국민 그 누구도 정치인들의 종교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사카 고등법원이 2005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도 “정교분리 원칙에 맞지 않다”는 해석이었다.

 우리나라는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관한 견해도 자유롭게 밝히고 있고, 정치인들이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것도 자유롭다. 서로의 영역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이 정부 들어선 뒤 불교 차별 논란 등 종교로 인한 정치·사회적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을 보니 일본식 ‘포용의 종교관’의 장점이 새삼스럽게 좋아 보이기도 한다. 사랑과 자비, 나눔과 일치, 화해와 평화라는 종교 본래의 정신에 충실하다면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 생길 까닭이 없다. 얼마 전 서울 조계사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됐다고 한다. 우리 종교가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는 ‘계기’로 해석하고 싶다.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