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빚 갈수록 태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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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빚이 너무 많다고 한다. 정부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당장 정부가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일치한다. 문제는 나라 빚이 계속 늘어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의견 차이다.

한쪽에서는 정부의 낙관적인 전망이 틀릴 수 있는 암초가 도처에 널려 있다고 보고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우리는 낙관하지 않고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 빚은 한 번 늘면 줄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3년 후 대통령이 바뀌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금 풍덩풍덩 써버릴 유혹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면 다음 대통령이 큰 일이다.

자칫하다간 멕시코 등 중남미처럼 정부 부문의 부실로 경제위기가 연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국가채무를 특집으로 다루는 소이는 여기에 있다. 위기의 연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건전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적자를 보거나 빚이 늘어나는 일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이 빚을 얻어 자신의 수입을 넘는 지출을 계속하면 빚이 쌓이고 머지 않아 파산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국가도 마찬가지로 적자재정을 지속하여 국가부채가 급격히 증가하면 결국 국가파산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국가의 부채는 개인의 빚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국가가 국내에서 돈을 빌리고 이어 얼마 안 가 세금을 거둬 빌린 돈을 갚는 경우에는 결국 국민 자신이 세금을 내 국가에 돈을 빌려준 자신에게 돈을 갚도록 하는, 다시 말해 ‘오른손이 왼손에게 갚는’일에 불과하다.

물론 부채를 갚기 위해 세금을 수십년 후에 거두는 경우에는 이 부담이 차세대에게 전가되므로 ‘우리 자녀에게 짐을 지우는’것이 된다. 하지만 현재 차입, 지출하는 이유가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을 통해 경제성장을 돕는 것이라면 성장의 과실은 주로 우리 후손이 갖게 되는 것이므로 수혜자부담 원칙에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적자 또한 개인의 적자와는 다르다. 20세기 초까지는 국가재정의 적자는 좋지 않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인해 심지어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도 많은 국가들이 균형재정을 유지했고 일부는 이를 위해 불황 중에 세금을 더 거두기까지 했다.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킨 것이 경제학자 케인스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정부지출은 경제의 총수요의 한 부분이므로 민간부문의 수요가 부족한 경기침체기에는 재정이 반드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적극적인 재정지출 확대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국가재정과 개인재정은 여러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주무장관인 진념 예산기획처 장관이 10월15일자 조선일보에 “나라빚, 위험 수준 아니다”라는 글을 써보내 이 논란을 잠재우려 애쓰고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론이 계속 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재정적자나 국가부채가 피상적으로 보는 해악과는 다른 측면에서 경제적 부담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점은 재정적자의 내용이다. 정부란 기본적으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이다. 따라서 재정지출도 기본적으로 정부서비스를 제공하고 국민경제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재정지출이 예를 들어 쓸모없는 규제의 유지와 같은 비생산적인 목적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민간부문에서 생산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었던 귀중한 자원을 낭비한 것이다. 이러한 쓸모없는 지출의 증가로 인해 재정적자가 늘게 된다면 그만큼 경제의 성장여력은 감소하게 된다.

두 번째의 문제점은 재정적자가 민간의 투자와 자본축적에 미치는 영향이다. 재정지출은 건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한정된 자원을 놓고 민간부문과 경쟁을 하게 된다. 재정적자의 증가는 자금시장에서 수요 증가를 일으켜 금리를 상승시키며 이로 인해 민간투자를 감소시키는, 이른바 ‘구축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자본축적을 저해하고 장기적으로 성장률을 하락시킬 수 있다.

세 번째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재원을 조달하는 방법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재정적자를 조달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차입이다. 차입과 관련해 특히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국가부채의 지탱 가능성이다. 즉 재정적자가 계속 누적돼 부채총액이 커지게 되면 이에 대한 이자부담이 증가하게 된다. 이자는 재정지출의 일부이므로 이로 인해 다시 재정적자가 확대되고 다시 부채 총액이 커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면 국가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이처럼 국가부채가 폭발적으로 누적돼 재정이 이를 지탱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면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선 필요한 재정지출을 할 수 없게 되므로 재정이 정부의 정책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아울러 국가기능 자체도 저하된다. 또 재정이 민간부문에서 대규모로 자원을 전용할 때, 이렇게 전용된 자원 대부분이 생산적인 공공정책적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채에 대한 이자 상환에 쓰이므로 경제의 성장기반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이르면 국가의 부채상환능력 자체가 의심받게 돼 정부의 차입능력이 저하될 것이며 결국 차입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위험 할증률이 올라가 금리가 치솟고 자금시장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또한 국가부채 중 상당부분이 외국에서 빌려온 것이라면 국가 신인도의 저하로 부채 차환이 중단되고 국외로의 자금유출이 발생하는 외채위기가 나타날 수도 있다. 거듭되는 멕시코의 외채위기도 과도한 정부부문의 대외부채가 그 촉발요인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국가부채를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나라의 국가부채는 중앙정부 기준으로 보증채무를 제외하고도 올해 말에 94조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정부의 부채 18조원을 합하면 1백12조원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이처럼 어마어마한 숫자는 그 자체로는 감(感)
을 잡기가 어려우므로 경제규모에 대비, 평가해야 의미가 있다. 즉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이 지속적으로 높아지면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국가부채의 지탱가능성은 우선 적자문제가 대두되는 초기의 경제규모 대비 국가부채나 실질금리수준, 경제성장률, 세입 및 세출의 추이 등에 의해 좌우된다. 다시 말해 국가부채의 규모가 당초부터 크고, 실질금리가 높아 이자부담이 커지고, 경제성장률이 낮아 경제규모가 국가부채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세입 둔화와 세출 증가가 가속되면 경제규모 대비 국가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 지탱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선 초기 규모를 보면 올해말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중앙정부 기준으로 약 20%로 OECD 평균인 71%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아 초기 조건은 유리한 상태다. 실질금리와 경제성장률의 격차 경우엔 과거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 덕분으로 경제성장률이 실질금리 수준보다 높았다.

따라서 앞으로도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추세로 복귀하면 장기적인 재정건전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앞으로 경제가 저성장을 거듭하고 금리가 높아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특히 국가부채의 증가는 금리를 상승시키고 구축효과를 통해 성장률을 낮추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어떻든 그 결과 실질금리가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상황이 지속되면 국가부채 비율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가령 정부는 현재 금융구조조정에 투입된 공적자금이 국가 부담으로 전혀 산입이 안 되고 2002년 이후 경제성장률이 평균 5%를 유지하며, 동시에 2002년부터는 이자비용을 제외한 재정수지가 계속 흑자를 내고, 실질금리는 성장률과 동일하다는 전제를 한 상황에서 국가부채 비율은 2003년부터 점차 하락한다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전제를 조금만 달리하면 국가부채 비율은 상당히 달라진다. 즉 경제성장 및 세입·세출에 대해서는 정부의 전망을 그대로 따르되 공적자금은 어느 정도 국가부담이 되고(40조원 추정)
실질금리도 성장률보다 높다(6%포인트로 추정)
고 가정하면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0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늘어난다. 물론 필자는 이 중간 정도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비율의 증가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세입·세출의 추이도 우려할 만하다. 앞으로 구조적인 재정지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구조변화로 고용보험, 생계보호 등 관련지출이 늘어나고, 인구의 노령화에 따라 연금 및 의료보험지출이 증가하는 등 사회보장지출이 전반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만일 통일이 되는 경우 이에 따른 재정지출의 급증도 중요한 고려사항이 돼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나타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증가추세에 대해서는 신중히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피상적인 비판으로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지나치게 의욕에 넘친 낙관론으로 재정여건의 변화를 간과하는 것도 장차 큰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

황진우 한화경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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