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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현정은 현대그룹만 지킬 것이냐, 현대건설까지 노릴 것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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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을 국내 최대의 기업집단으로 발돋움시킨 주춧돌이다. 현정은(55) 현대그룹 회장은 2003년 10월 회장 취임 이후 그룹의 적통성을 되찾기 위해 현대건설 인수에 매진했다. 지난달 16일 현대건설 주주협의회가 우선협상대상자로 현대그룹을 선정할 때만 해도 꿈이 이뤄지는 듯했다.

 그는 지난달 18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에 있는 고(故) 정주영·정몽헌 두 선대 회장의 선영을 참배한 뒤 “정주영 명예회장이 첫 삽을 떴고, 정몽헌 회장의 손때가 묻은 현대건설을 이제야 되찾았다”고 말했다. 당시 기자들이 ‘인수전에서 시아주버니인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과 경쟁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것을 어떻게 풀 것이냐’고 묻자 현 회장은 “앞으로 잘 지낼 것이다. 정몽구 회장님을 제가 존경하고…, 집안의 정통성은 그분에게 있다”며 여유를 찾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현대건설 주주협의회가 현대그룹이 제출한 프랑스 나티시스은행 대출확인서(약 1조2000억원)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결국 양해각서(MOU)를 해지하기에 이르렀다. 현 회장으로선 손아귀에 넣었던 현대건설을 놓치는 상황에 처한 셈이다.

지난달 18일 경기도 하남시 고 정주영·정몽헌 회장의 묘소를 찾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연합뉴스]

 현대건설은 단순히 그룹의 적통성만 걸려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그룹 경영권의 열쇠를 쥐고 있다. 경영권 방어는 현 회장이 취임했을 때부터 눈앞에 놓인 가장 큰 현안이었다. 2003년 회장 취임 당시 현대상선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놓고 범현대가인 KCC와 분쟁을 벌였다. 2006년에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상선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대그룹은 경영권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현대상선의 지분 구성은 현 회장과 범현대가 간에 박빙의 상황이 이어졌다.

 현 회장은 우호지분을 합쳐 현대상선 보통주 가운데 약 30%를 갖고 있다. 현대중공업·KCC 측은 26.3%를 보유 중이다. 이번에 매물로 나온 현대건설은 현대상선 보통주 7.2%를 갖고 있다. 이 지분이 범현대가로 넘어가면 현 회장은 현대상선 경영권을 빼앗길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현대차그룹과 극한 싸움을 벌인 것이다.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현대그룹은 감성에 호소하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내용을 담은 광고를 잇따라 내보냈다. 9월 추석 연휴 이후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해 신문 광고 8편, TV 광고 3편 등 총 11편을 내보냈다. 그러나 2003년 KCC와의 경영권 분쟁 때와는 달리 여론과 금융권이 현 회장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뒤에도 현대차그룹과 연일 고소·고발과 가처분 신청 등의 법적 조치를 쏟아내며 진흙탕 싸움을 했다. 현대그룹은 지난달 25일 현대차그룹과 관계자들을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고, 지난달 29일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500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맞서 현대차그룹도 지난달 30일 현대그룹을 무고·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이제 현 회장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현대건설 주주협의회가 내놓은 현대상선 지분 중재안을 두고서다. 주주협의회와 ‘저위험·저배당’ 거래를 통해 현대상선만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소송에 의지해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을 모두 노리는 ‘고위험·고배당’을 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주주협의회가 내놓은 안은 검토할 가치도 없고,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룹 차원의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상선은 21일 “현대그룹 컨소시엄은 주주협의회의 조치들이 위법한지 여부에 대해 가처분 등 권리구제 절차를 진행시켜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구하는 중”이라고 공시했다.

 현대그룹이 주주협의회의 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법정 공방이 불가피하다. 현대그룹은 지난 10일 MOU 해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낸 상태다. 21일 우선협상대상자 지위에서 박탈당하자 내놓은 입장자료를 통해 “법과 정의의 수호자이자 약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의 공명정대한 판단으로 현대그룹의 우선협상자 지위가 확인되기를 희망한다”며 법정 공방을 시사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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