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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황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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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황해’가 그리는 세상은 비열하고 비정하다. ‘추격자’ 주연 하정우(가운데)와 김윤석이 각각 빚을 갚기 위해 청부살인을 맡는 남자와 브로커 역을 맡아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인다. [팝콘필름 제공]


이번엔 추격자가 아니라 도망자다. 2008년 500만 관객을 끌어들이며 충무로 트렌드의 물꼬를 스릴러로 바꿨던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 주연배우 김윤석·하정우가 다시 모인 영화 ‘황해’ 얘기다.

 ‘황해’는 ‘추격자’의 세 주역이 재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찌감치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았다. 최근 10년간 가장 인상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신인 중 하나였던 나홍진 감독은, 청부살인 하러 한국에 갔다 생명의 위협에 쫓기는 한 조선족 남자의 비극만으로 2시간 36분을 꽉 채운다. 적어도 작품성만 놓고 따진다면, 데뷔작으로 성공한 감독이 두 번째 작품은 실패한다는 소위 ‘2년차 징크스’는 피해간 것으로 보인다. ‘황해’에는 할리우드 메이저배급사인 20세기폭스사의 투자 등 총제작비 130억원이 투입됐다.

 ◆조선족의 부서진 희망=‘황해’를 보려면 이 세상은 어둡고 비열하고 거짓말과 음모로 가득차 있다는 하드보일드 세계의 전제를 인정해야 한다. 택시운전수, 살인자, 조선족, 황해 이렇게 이어지는 총 네 개의 장(章)을 거치며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정서는 지독한 절망과 냉소다.

 조선족 구남(하정우)은 브로커 면가(김윤석)의 청부를 받아 사람을 죽이러 한국에 온다. 잘 풀리면 빚도 갚을 수 있고, 돈 벌러 간 후 소식 끊긴 아내도 찾을 수 있다. 살해 대상인 대학교수가 엉뚱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일은 꼬인다. 구남이 입은 때묻은 내복처럼 꾀죄죄한 그의 삶에 희망은 쉽사리 손을 내밀지 않는다. 결혼사진 액자의 유리처럼 산산 조각난 구남의 가정은 끝내 복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는 구남에 비해 상대적인 힘의 우위에 있는 면가나 교수 살인에 끼어든 조폭 보스 태원(조성하)에게도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는다. 피칠갑을 한 채 서로를 속이고 죽이는 이전투구 끝에 등장인물 전원은 파멸을 맞는다.

 영화는 누아르라는 장르에 걸맞게 물리적으로도 어둡다. 60%를 비 내리는 밤 장면으로 채웠던 ‘추격자’보다 더 나아갔다. 잔혹함의 수위도 상당히 높다. 도끼와 칼, 심지어 족발 뼈가 살상무기로 쓰이고, 피는 흘러 넘친다. ‘아저씨’처럼 주인공의 홍길동적인 활약상을 돕기 위한 도구로서의 잔혹함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잔혹함이다. 게다가 ‘황해’에는 인물의 깊이를 헤아릴 만한 드라마적 요소가 충분하지 않다. 결말도 예상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힘들다. 주인공을 통한 대리만족이 아니라 동반추락의 상실감이 훨씬 크다. 특히 현실의 고통을 극장에서나마 잠시 잊길 바라는 이들에게 ‘황해’는 현실을 스크린에서 재확인하는 우울한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대중의 선호가 엇갈릴 것이다.

 ◆사상 최대의 자동차 액션=오히려 이 영화의 대중성은 ‘야심’ 혹은 ‘집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나홍진 감독의 감성과 액션이 분출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에서 찾을 수 있다. 2시간 36분이라는 비상업적 러닝타임을 팽팽하게 끌고 가는 집중력이다. 특히 차량 50대 중 20대가 완파됐다는 ‘황해’의 자동차 액션은 영화에 대한 선호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명장면이다.

 면가와 구남의 자동차 액션 장면은 ‘액션도 대사를 한다’는 표현이 걸맞을 것이다. 13대의 카메라가 액션의 ‘표정’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게 잡아낸다. 핸들을 잡은 하정우와 김윤석 두 배우의 연기는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액션 장면에 임하는 배우의 그것보다 리얼하고 처절하다. ‘황해’는 올해 한국영화가 이룬 리얼리즘의 성취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보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황량해지리라는 점도 각오해야 한다. 현실의 스산함을 스크린에서 두 배 세 배 농축해서 겪는 경험은, 그 영화가 거둔 예술적 성취와 별도로 수월하지 않은 일이다. 22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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