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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⑬ 천안 청룡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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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초교 오르막을 넘어서면 주택이 많은 구성동에서 아파트가 펼쳐지는 청수동이다. 지난해 택지지구 입주가 시작되면서 상가 건물이 세워지고, 완연한 신시가지 모습을 드러냈다. 변모하는 천안 청룡동, 어제와 오늘을 살펴봤다.

글=조한필 기자
그림=조영회 기자

천안 청룡동(행정동)은 구성동·청수동·청당동·삼룡동·구룡동 등 5개 법정동으로 구성돼 있어 청수택지지구 개발로 크게 변화하고 있는 지역이다. 사진은 구성동 지역 모습. [조영회 기자]

청룡동(靑龍洞)은 행정동명이다. 청룡주민센터는 5개 동을 관할한다. 구성동·청수동·청당동·삼룡동·구룡동의 천안시가지 동남쪽의 5개 법정동이 포함돼 있다. 청룡동 이름은 청수동·청당동의 ‘청’과 삼룡동·구룡동의 ‘룡’자를 따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국도 1호·경부선철도 등 전국을 잇는 주요 교통로가 청룡동 관내를 남북으로 관통한다. 동서로는 남부대로가 아산과 충북 진천을 잇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호남과 영남의 갈림길이었던 천안삼거리가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국을 잇는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청룡동 지역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청수택지개발로 120만㎡의 택지가 조성됐다. 기관들이 많아 청수행정타운으로 불린다. 이미 천안동남경찰서, 천안세무서(20일 이전), 연금관리공단, 건강보험공단이 들어섰다. 천안 법원과 검찰이 옮겨올 채비를 하고 있다.

 삼룡동엔 천안박물관이 개관했고 천안삼거리공원은 흥타령축제·웰빙식품엑스포(2009년) 등 대규모 행사를 치루면서 크게 시설을 확장했다. 가까이 생활체육공원이 조성(10만㎡)되고 있다. 청룡동을 중심으로 천안 동부지역이 서부지역에 맞서 신개발지로 부상하고 있다. 박종화 청룡동장은 “3년여 근무하는 동안 요즘처럼 역동성이 느껴지는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신용산(48·사진)

태어나서 쭉 청룡동 관내서 살아온 신용산(48·사진)씨. 청룡8통장을 맡고 있는 그는 현재 극동아파트가 들어선 청당골에서 태어났다. 20대 후반때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청수동을 떠나 구성동에 살고 있다. 그는 “청당골에서 구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위로 온통 배·사과·포도 등 과수원 천지였다”고 회고했다. 청수초교 6회인 신씨는 “당시 우리 학교로 청당동인 거재·샛터말, 구룡동인 배울 마을, 삼룡동인 둔지미 등에 사는 친구들까지 다녔다”고 말했다. 현재 청룡동에 포함된 동(洞)들이 같은 생활권임을 알 수 있다.

 청수택지개발로 새 도로가 뚫리고 옛 도로가 확장된 청수동에 몇십년 전이나 볼 수 있던 마을구판장이 있어 이채롭다. 학용품과 생필품을 팔고 있다. 2000년대와 70, 80년대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청룡9통 이문자(57·여·구성동)씨는 주택지역 주민들의 화목함을 자랑한다. “우리 동네는 대여섯 집이 해마다 한집 한집씩 돌아가며 김장을 한다. 그러니 일주일간 동네가 김장잔치로 떠들썩하다. 이것이 사람 사는 재미가 아니겠냐.” 이런 구성동도 신성미소지움·주공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습이 바뀌고 있다.

재미있는 옛 마을 이름
비행기 길 알려주는 탐조등 있어 ‘불 도는 산’

구성동(九星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내면의 고좌리, 복성리 및 구곡리를 합해 천안군 환성면(歡城面) 구성리가 됐다. 63년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해 천안시로 승격됨에 따라 천안시에 편입, 구성동이 됐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한 농촌이였으나 80년대 이후 도시화가 급속히 이뤄졌다.

고래울 고좌리(高佐里) 라고도 부른다. 사면이 산지로 둘러 싸여있고 마을은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잡아 고좌리로 불렀다.

꽃재(고재) 굴울 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 옛날의 삼남대로가 이곳으로 통했다. 서울로 올라갈 때 삼거리를 지나면서 낮은 구능이 이어지다 이곳에 이르면 꽃이 만발해 길손들이 꽃재(꽃핀 고개)라고 불렀단다. 음이 바뀌어 고재가 된 것이다.

굴울 구성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천안변전소 동쪽이다. 굴울 이름은 ‘골울’에서 비롯됐다. 골은 곡(谷), 울은 울타리(柵)을 뜻한다. 930년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도독부를 설치한 후 공주의 후백제군 침입을 막기위해 이곳에 울타리을 세웠다고 한다

불대산(불 도는 산) 굴울 마을 뒤에 있는 산. 일제때 이 산의 정상에 비행기 길을 알려주기 위해 회전탐조등대를 세워 ‘불 도는 산’이 됐다.

청수동(淸水洞)

옛 정취가 묻어나는 청수동 마을구판장에선 학용품과 생필품을 판다.

1920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의해 읍내리 일부를 가르고 환성면 청당리를 병합해 이곳에 있는 수도산 이름을 따 청수정이라 했다. 46년 일본식 동명을 바꿔 청수동이 됐다. 50년대까지 작은 광산촌(동우광산·금광)이었으나 지금은 주택지로 변모했다.

수도산(水道山) 500년전 옛날에 편찬된 여지승람에 수조산(水潮山)으로 기록돼 있는 산이다. 일제강점기 정상에 수도국이 설치돼 수조산이 수도산이 됐다. 풍세면 남관리에서 물을 끌어와 천안시에 공급했다. 폐쇄된지 오래다.

청수동방죽 청수동 남쪽 풍세가도에 있는 방죽. 용곡동과 신방동 일부에 농업용수를 댔다. 한때 천안의 명물 빙상경기장이 있었고 낚시터로도 각광을 받았다. 현재 청수택지개발과 함께 말끔한 수변공원으로 조성됐다.

청당골 청수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청수초교의 동쪽에 있다. 지금의 극동아파트 자리. 천수답이 많아 논농사가 어렵고 밭농사가 발달됐다. 옛날 이 마을에 산신당이 있어 당골이라고 하다 청수동이 생기면서 청당골이 됐다.

청당동(淸堂洞)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따라 신둔지리와 거재리를 합해 청당리라 했다. 천안군 환성면에 속했다가 53년 청당골은 천안읍에 편입하고, 나머지는 환성면에 그대로 있다가 63년에 편입됐다.

거재(巨才) 남쪽으로는 토성산, 동쪽으로는 갈미재에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로 청당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옛날 거대한 인재가 배출된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

용마부도(龍馬負圖, 龍馬飛頭) 청수동방죽의 동쪽에서 시작된 작은 구릉이 천안삼거리로 이어지는 곳이다. 낮은 구릉이 용이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나르는 형상이라 용마비두라고 한다. 예부터 명당이 있어 후손이 잘된다는 풍수지리설이 있다. 한화 그룹의 김승연 회장 조부(김재민)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가 공주로 이장.

삼용동(三龍洞)

70년대 초 삼룡동에 있던 이발관 모습. [출처=천안시정40년사]

삼거리와 용마산의 머릿자를 따서 삼룡동이라고 하였다.

둔지동(屯地洞) 삼거리공원 맞은편으로 몇년 전까지 손톱깎이로 유명한 벨금속 공장이 있었다. 936년 고려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려고 천안에 왔을 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곳이라 둔지동이다. 둔지미로도 불린다.

도리티고개 천안삼거리에서 목천읍 삼성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개가 너무 가팔라 돌아간다’는 뜻으로 도리티다. 6·25 때 미군 24사단 34연대가 포진했던 방어선이다.

구룡동(九龍洞)

원래 풍세면 구룡리였으나 83년에 용평(龍平)부락을 합해 천안시에 편입됐다.

용정마을(龍井) 풍세면 미죽리와 경계를 이룬다. 마을의 큰 우물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배울(梨谷) 중리마을의 동남쪽에 발달된 마을. 옛날엔 이 마을 앞에 배나무가 많아 울타리를 친 것 같아 배울이라 했다.

파직이고개 경부선 철로 옆으로 풍세면 미죽리로 넘어가는 고개. 옛날에 증기기관차가 다닐 때 고개를 넘으려면 힘이 들어 그 소리가 “파직이 파직이”처럼 들렸다고 해 파직이고개다. 또 다른 해석은 워낙 높은 곳이라 벼농사 짓기가 어려워 피(稷)를 심어 피직이고개, 음이 변해 파직이고개가 됐다는 것.

불우이웃 돕는 노인들

청룡9통(구성동)에 있는 구광경로당 노인회원들.

청룡9통(구성동) 관내의 ‘구광경로당’은 올해로 4년째 경로당 운영비를 절약해 모은 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고 있다. 올해도 30만원을 내놨다. 난방비를 비롯해 전기요금 등 각종 공과금을 절약해서 만든 돈이다.

 정민제(72)노인회장은 “우리가 덜 쓰고 아끼면 적은 돈으로나마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다”며 항상 경로당 운영비 절약을 강조했다. 정 회장은 “회원들이 취지를 십분 이해하고 기꺼이 동참해 매년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는 이와 별도로 남편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돼 병간호와 어린 자녀의 양육으로 힘들어하는 가정에게 30만원을 기탁했고, 올해는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폐지를 주워가며 생계를 잇는 한 독거노인에게 쌀 20㎏ 2포대를 기탁한 바 있다.

남원루기(南院樓記)

“천안이 영주(寧州·천안의 옛이름)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께서 견훤을 취할 적에 군사 10만명을 주둔시켜 보루를 쌓고 병사를 훈련시켜 위엄을 빛낸 곳이기 때문이다. 그 군대가 주둔한 곳을 고정(鼓庭), 그 성을 왕자성(王字城)이라 하였으니 주를 설치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궁묘가 있어 고을 사람들을 복되게 한 지도 이미 500년이 되었구나.(중략) 고정과 왕자성의 모습이 완연히 예전과 같으니, 왕업을 일으킨 공이 지금까지 이어짐을 알겠구나.”

◆남원루=천안삼거리 근처, 혹은 구성동 옛 원거리에 세워졌다고 하나 사라진지 오래로 위치가 정확치 않다. 고려 우왕 1년(1375)에 천안군수 임군석이 여행자 편의를 위해 세웠다. 공민왕때 문신 강호문이 1377년 지은 기문만이 전해진다. 태조 왕건의 유적인 고정과 왕자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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