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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배명복의 세상읽기

한반도에 산타가 올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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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지구촌의 모든 착한 어린이에게 성탄절 이브에 맞춰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시차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지만 그게 어디 간단한 일이겠습니까. 북반구에서 남반구까지 같은 시간대에 사는 착한 어린이들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겁니다. 착한 어린이들이 그렇지 않은 어린이보다 훨씬 많을 테니까요. 게다가 어린이들이 잠든 시간에 머리맡에 살짝 놓고 오거나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어둔 양말 주머니에 몰래 넣어놓고 와야 합니다. 올해도 산타클로스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겁니다.

 나흘 앞으로 다가온 성탄절을 앞두고 루돌프 사슴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있군요. 정확하고, 효율적인 배달 계획을 짜기 위해서겠지요.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있는 대장 루돌프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웬 지도를 펼쳐놓고 있군요. 아니, 이게 어디 지도입니까. 한반도 지도 아닌가요. 남북한 전역과 중국과 일본 일부에 점선 표시를 해놓았군요. 무슨 뜻일까요. 한반도는 위험지역이니 우회해서 가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배달은 하되 각별히 조심하라는 뜻일까요. 어제 아침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지 오피니언 페이지에 실린 만평(漫評)입니다. <그림 참조>

성탄절을 앞두고 루돌프 사슴들이 지구촌의 착한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 배달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12월 20일자.

 기자란 직업을 갖고 10년 넘게 신문에 칼럼을 써왔지만 이번처럼 글쓰기가 부담스럽고 망설여진 적이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들조차 한반도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마당에 “자다가 웬 봉창?”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반도 사태에 대해 쓰자니 오늘 내일은 고사하고, 당장 한두 시간 앞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잘못하면 완전히 허방을 짚거나 버스 다 지나간 다음에 손 드는 꼴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군(軍)이 예고했던 사격훈련은 끝났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앞을 예단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아직 유동적입니다. 천균일발(千鈞一髮), 즉 ‘무거운 물건이 머리카락 한 올에 매달려 있다’는 중국인들 특유의 과장된 수사(修辭)가 외려 실감나는 상황입니다.

 한반도 위기를 전하는 외신에는 ‘화약고(tinderbox)’란 단어가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이나 발칸반도, 코소보에나 어울릴 줄 알았던 단어가 어느새 한반도와 연평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자축한 게 언제인데 지금은 전쟁을 걱정하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불안한 국면입니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가요.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것이 저만의 일일까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체제를 이끌고 있는 북한 지도부에 형언(形言)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민간인이 살고 있는 연평도에 북한이 포 사격을 해대지만 않았어도 지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북한은 남한이 먼저 사격훈련을 했기 때문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텅 빈 바다에 포를 쏜 것과 사람이 사는 섬에 포를 쏜 것이 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1953년부터 남측 영해로 사실상 굳어진 수역에서 37년째 해온 통상적 훈련을 자기네 영해에 대한 도발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백 번을 양보해 설령 그곳이 분쟁수역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입힌 피해는 물고기 몇 마리 죽인 것밖에 없는데 북한은 민간인을 2명을 포함해 4명의 우리 국민을 숨지게 했습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입니다.

 솔직히 한반도 정세가 너무 불안해 제대로 잠을 못 잤습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제 아침 출근을 하면서 시민들 표정을 살폈습니다. 평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여느 월요일 아침의 출근길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대한민국 국민의 표정이었습니다. 의연한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정은 대개 비슷할 것입니다. 북한의 말도 안 되는 도발엔 단호히 대처하되 전쟁은 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아닐까요. 단호한 대응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일 겁니다. 저도 비슷한 심정입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처음부터 즉각 강력 대응했더라면 우리 바다에서 우리가 훈련을 하는데도 남이 시비를 걸고, 일전(一戰)까지 각오해야 하는 황당한 사태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정부와 군(軍)이 북한과 일수불퇴(一手不退)의 위험한 기싸움을 벌인다는 비판을 들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잘잘못을 놓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엄중합니다. 일단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합니다. 다시는 북한이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결연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위기 국면이 지나고 나면 냉철한 복기(復棋)가 필요합니다. 북한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입니다. 잘못 다루면 우리가 다칠 수 있습니다. 폭발물처리반 요원이 뇌관을 제거하듯 최대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근거 없는 기대나 희망적 사고에 근거해 거칠게 다루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을 다루는 최선의 방책을 놓고 정치권은 초당(超黨)적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위험한 땅에도 착한 어린이는 살고 있습니다.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가 달리는 길이 위험하다고 그 길을 외면해서야 산타클로스가 아니겠지요. 정세가 불안하고 마음은 무거워도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생각하는 뜻 깊은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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