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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닌 야구를 원한다면 요미우리엔 가지 마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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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14면

이승엽이 요미우리 생활 5년을 마감하고 오릭스로 이적했다. 마음고생 많았던 이승엽이 부활을 다짐하며 타격 훈련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민타자’ 이승엽(34)이 10일 서울에서 일본프로야구 오릭스 버펄로스 입단식에 참석했다. 지난 1월 출국 이후 11개월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보인 이승엽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미우리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으니 의외로 속이 후련했다.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면 안 된다. 어쨌든 많은 돈을 받고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요미우리는 최고의 팀이었다.”

한국선수들의 무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이승엽은 지난 5년간 입어온 일본 최고 명문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벗었다. 내년부터는 오릭스 유니폼을 입는다. 이날의 입단식은 한편으로 요미우리와의 ‘이별식’이었다.
 
잘할 땐 간을 빼줄 듯, 부진하면 난도질
1986년 대구 중앙초등학교 야구부 숙소에는 커다란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통산 868홈런을 때린 일본야구의 영웅 오 사다하루(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가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었다. 소년 이승엽이 막연하게 요미우리를 동경하게 된 계기였다.

이승엽은 95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 9년간 통산 324홈런을 때린 뒤 일본 진출을 선언했다. 2004년 지바 롯데 머린스에 입단, 2군을 드나들며 부진했지만 이듬해 30홈런을 터뜨렸다. 그의 선택은 요미우리였다. 지바 롯데가 제시한 연봉보다 낮은 1억5000만 엔(약 20억원)에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이승엽은 그해 개막전에서 요미우리의 제70대 4번 타자로 임명됐다. 2006년 41홈런을 토해내며 센트럴리그 홈런 2위에 올랐다. 요미우리 구단과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간이라도 빼줄 듯 이승엽을 위했다. 그에게 매료된 요미우리는 2007년부터 4년 총액 30억 엔(약 410억원)을 보장, 이승엽을 일본프로야구 최고 연봉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달콤한 날은 길지 못했다. 2007년 30홈런을 때려냈지만 요미우리가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자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 회장은 “외국인 선수 때문에 졌다”며 이승엽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정민태

설상가상으로 이승엽은 오른손 검지 부상으로 고전했다. 2008년부터 올해까지 이승엽은 2군에 더 오래 있었다. 이승엽과 요미우리의 갈등은 3년간 계속됐다. 요미우리는 다른 구단으로부터 제2의 이승엽, 제3의 이승엽을 계속 사들였다.

요미우리는 이승엽과 4년 계약을 하자마자 니혼햄 파이터스 강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37)를 영입했다. 오가사와라는 이승엽과 같은 왼손타자인 데다, 포지션(1루수)도 같다. 오가사와라는 3루수로 나서다가 이승엽이 자리를 비우면 어김없이 1루 미트를 꼈다.

2008년엔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4번 타자 알렉스 라미레스(36)를 사들였다. 이승엽은 경기에 나가더라도 6번, 7번 타자로 밀렸고 몇 경기 부진하면 2군으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이승엽은 상처를 많이 입었다. 구단 고위층은 쉴 새 없이 이승엽을 공격했고, 하라 감독도 돌아섰다.

일본 언론들은 이승엽을 조롱했다. 그를 공격하는 것이 거대 자본과 성과 지상주의를 상징하는 요미우리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이승엽은 상처 받고 망신당했지만 요미우리에서 5년 동안 400억원 넘게 벌었다. 일본 언론으로서는 탐나는 먹잇감이었다.
 
한국선수에겐 규율 강요 ‘이중잣대’
이승엽의 퇴단은 낡은 명제를 다시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미우리는 한국인의 무덤’이라는. 그동안 요미우리에서 뛴 조성민(38·1996~2002년)·정민철(38·2000~2001년)·정민태(40·2001~2002년) 등 한국의 일류 선수들은 모두 화려하게 입단했다가 초라하게 퇴단했다.

조성민은 고려대 시절 계약금 1억5000만 엔을 받고 한국인 최초로 요미우리와 계약했다. 98년 전반기에만 7승을 올려 실력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해 올스타전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다친 뒤 기회를 얻지 못하다 이후 3승만 거두고 요미우리를 떠났다.

한화 이글스 최고의 오른손 투수였던 정민철도 2000년 계약금과 연봉 8000만 엔(약 11억원)씩 받고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지만 통산 3승만 거둔 채 2년 만에 돌아왔다. 정민태는 2001년 계약금 1억5000만 엔, 연봉 1억3000만 엔(약 18억원)에 요미우리에 입단했지만 2년간 2승만 거두고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했다.

한국 선수는 일본에서 엄연한 외국인 선수이지만 모습은 일본 선수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를 비롯한 일본 구단은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흑인이나 백인 선수에겐 오직 야구만 기대하지만 한국인은 요미우리 특유의 규율로 묶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1군 외국인 선수 출전 제한(4명)이 있기 때문에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꼭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요미우리의 외국인 선수는 상당한 중압감에 시달린다. 다른 구단보다 두 배 정도 돈을 주는 대신 그만큼의 성과를 요구한다.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쟁쟁한 경쟁자들을 계속 사들인다. 내부 경쟁이 워낙 심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크다. 초엘리트 집단의 특징이다.

조성민은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으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성적을 내지 못하면 싸늘하게 변한다. 심지어 코치에게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경우가 많다. 요미우리에 가려 하는 선수가 있다면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요미우리는 매년 우승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팀이다. 포지션이 겹치더라도 좋은 선수는 일단 사들이고 본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의 상대는 밖이 아닌 내부에 있다. 신인 때부터 요미우리에서 커온 선수도 외부에서 영입한 선수에게 밀리기 일쑤고, 자리를 잡은 용병도 빈틈이 조금 보이면 흔들린다.
일본이 한 수 아래로 보는 한국 선수라면 약점이 잡히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진다. 조성민도, 이승엽도 부상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 조급하게 복귀했다가 뒤탈이 오래갔다. 마음고생은 몇 배 컸다. 이 때문에 요미우리에서는 ‘한국인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뿌리내렸고, 한국에서는 ‘요미우리는 한국인의 무덤’이라는 말이 생겼다.
 
일본인도 부진하면 용서 없는 요미우리
범위를 넓혀서 봐도 외부 선수가 요미우리에서 기량을 꽃피운 예는 많지 않다. 심지어 통산 3085안타를 친 재일동포 강타자 장훈(70)도 요미우리에서 뛴 4년(1976~79년) 동안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첫해 182안타를 때린 뒤 해마다 안타가 줄자 롯데 오리온스로 트레이드됐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타격 3관왕(홈런·타점·타율)을 세 차례나 차지한 오치아이 히로미쓰(57·현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도 1994년부터 3년간 요미우리에서 뛰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커리어 중 요미우리에서 따낸 타이틀은 하나도 없다. 그는 96년 시즌 중 니혼햄으로 떠났고 2년 뒤 은퇴했다.

엘리트 선수, 특히 타자에 대한 요미우리의 탐식(貪食)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정은 대개 비슷했다. 다른 팀에서 빼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을 거금을 주고 사들인다. 다른 팀에서 빼오는 것으로도 요미우리 전력이 강해진다고 믿는다.

전성기가 지난 이들은 요미우리에서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몇 년 뒤 쫓겨날 때는 대부분 초라한 신세다. 이 때문에 일본야구에선 “부자가 되고 싶으면 요미우리로 가라. 그러나 야구를 하고 싶다면 요미우리로 가지 마라”는 말이 있다.

2005년 지바 롯데 이승엽보다 2006년 요미우리 이승엽이 훨씬 강했다. 그러나 이승엽이 거물 대접을 받기 시작한 2007년부터 그의 심장은 계속 짓눌렸다. 이승엽은 “오릭스에서 30홈런·100타점을 기록하고 싶다. 내년 시즌 요미우리와 상대하게 된다면, 나를 2군에 뒀던 요미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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