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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만 할 수 있다면 감옥도 좋다”덩샤오핑버핏도 브리지 게임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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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02면

17일 오전 10시 서울 압구정동 한국브리지협회 사무실. 밤새 소복이 쌓인 눈길을 헤치고 온 40여 명의 ‘사모님’들로 10여 개의 초록색 테이블은 금세 가득 찼다. 카드가 들어 있는 ‘보드’를 가운데 두고, 각자 ‘비딩용 박스’를 옆에 세워 놓은 채 말도 없이 카드를 제쳤다 뒤집었다 한다. 이들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브리지 게임. 포커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카드 게임이다. ‘포커=도박’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반면 브리지는 돈을 거는 짜릿함이 없는 대신 엄청난 지적 자극을 동반하는 두뇌 플레이가 강점이다. 16세기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위스트(whist)’란 이름으로 시작돼 ‘브리지 위스트(bridge whist)’ ‘옥션 브리지(auction bridge)’ 등으로 진화하다가 1925년 미국의 억만장자 해럴드 반더빌트(Harold Vanderbilt)에 의해 ‘콘트랙 브리지(contract bridge)’로 정착, 오늘에 이른다.

2010 대한민국 상류사회에 부는 브리지 게임 바람

가장 큰 묘미는 ‘비딩’을 통해 파트너끼리 스스로 획득할 목표를 ‘계약’하고 플레이에서 계약을 정확히 달성하는 데에 있다. 여타의 카드 게임과 달리 룰이 간단치 않고 바둑 수준의 깊이가 있을뿐더러, 운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한 철저한 두뇌 싸움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서머싯 몸은 ‘인간의 지혜가 고안한 가장 재미있고 지적인 카드 게임’이라 칭송하기도 했다.브리지는 팀워크를 중시하는데다 돈을 걸지 않고 에티켓을 엄격히 지키는 신사적인 게임이다. 이 때문에 구미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귀족중심 상류사회의 ‘사교를 위한 소양’으로 인식돼 왔다. 특히 외교가를 중심으로 ‘국제인의 교양’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현재 130개국 4000만 명가량이 즐기고 있다. 2002년 솔트레이크 겨울올림픽에서는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브리지 매니어 중에는 유명인도 많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파트너를 이뤄 ‘2007 북미 브리지 챔피언십’에 출전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특히 워런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총회 때마다 주주들과 이 게임을 즐긴다. 그는 브리지를 통해 경영철학을 배운다고도 하며, “하루 24시간 브리지를 같이할 점잖은 3인의 동료 수감자만 있다면 평생 감옥에서 보내도 좋다”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낼 정도다. 덩샤오핑,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대표적인 매니어로 꼽힌다.

외교가에선 ‘국제인의 교양’으로 통해
국내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젤라 안이 가장 먼저 브리지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50여 년 전부터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진행돼다 귀화 1호 미국인인 고 민병갈(Carls Muller) 전 천리포 수목원장의 노력으로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993년 외교관을 비롯한 외국생활 경험자들이 의기투합해 한국브리지협회를 발족했다. 2010년 12월 현재 국내 회원 수는 200여 명. 인터넷 동호회 등을 통해 게임을 즐기는 인원까지 합치면 2000명 정도다. 직업상 외국인과의 교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브리지를 익혀온 외교관 부인들을 비롯해 기업가, 교수, 바둑기사 등이 많다.

이들은 매주 10여 개의 클럽으로 나뉘어 게임을 즐기며, 정기적으로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하고, 매년 아시아태평양 브리지 대회에 출전한다. 브리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일단 일정 기간 배워야 하고, 4인씩 짝이 맞는 모임에 들어가야 하는데 주로 지인의 소개를 통해 모임이 형성되므로 상류사회 사교의 장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또 게임 자체가 심오한데다 엄격한 룰과 에티켓이 요구되고, 수준 차이가 나면 게임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초심자의 접근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 웬만한 전문지식은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되는 요즘 세상에도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시중에 한국어 입문서적 한 권 없는 실정이다.

협회 차원에서도 고민이 많다. 외국에서는 브리지가 바둑, 체스 등과 함께 ‘두뇌 스포츠’ 게임으로 자리 잡아 유력한 올림픽 종목으로 거론될 정도로 저변이 넓어 선수층도 탄탄한데 국내에서는 아직 인지도 자체가 미미한 수준이기 때문. “가까운 일본만 해도 협회 회원이 7000명에 1년 예산이 25억 엔이고, 중국은 아예 국가시책으로 장려해서 베이징 올림픽 때 마인드 스포츠 대회까지 열었죠. 회원만 30만 명에 국가와 기업에서 물심양면으로 후원이 대단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비로 걷은 1000만원이 1년 예산이에요.” 한국브리지협회 유인아 회장의 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브리지를 배우려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10년 가까이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에만 있던 강좌가 최근 현대백화점과 반얀트리 리조트에도 개설됐다. 유 회장은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많아지고 은퇴 이후의 여가 선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그런지 초창기보다 브리지 인구가 다섯 배쯤 늘었다”고 전했다.

마음과 마음 잇는 파트너십의 게임
외국에서는 브리지가 더 이상 상류 사회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대회 출전이라는 경쟁적 목표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남녀노소 관계없이 가정에서도 즐기며, 은퇴자들이 연령과 체력에 무관하게, 부부가 함께 돈 한 푼 없이도 여가를 즐기고 이웃과 어울리는 좋은 소일거리이기도 하다.

교환되는 모든 정보를 기억하여 마음속에 상대의 패를 그려놓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뇌 활성화와 치매 예방 효과도 있다.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끝없이 배워야 하고, 도전을 유도하고, 경쟁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에 자기 발전의 성취감을 무한히 누릴 수 있다. “브리지를 하지 않는다면 비참한 노후를 보내게 될 것이다”는 미국 정치가 루디 보쉬위츠(Rudy Boschwitz)의 말처럼 브리지가 제공하는 지적 도전과 정서적 자극은 노후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도 있다. 함명철 전 체코·싱가포르대사의 부인 김정례씨는 “언어나 사교성이 부족하더라도 브리지를 하면 금방 친구가 된다”며 “남의 뒷담화나 쓸데없는 얘길 안 하고 건전하게 여가 선용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주 앉은 파트너의 마음을 말이나 제스처가 아닌 카드가 이어주기 때문에 ‘브리지(bridge)’라고 부를 정도로, 뭐니뭐니해도 브리지는 ‘파트너십’의 게임이다. 운에 좌우되지 않는 철저한 두뇌 싸움이기에 흔히 바둑과 비교되지만, 개인 플레이가 아니라 파트너와의 연대게임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비딩할 때부터 파트너와 마음이 통해야 하고, 게임 내내 파트너와 호흡을 맞춰 정보와 심리를 교환해야만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기에 게임 속에서 타인과 공생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파트너와의 절묘한 호흡으로 강적을 물리쳤을 때의 쾌감은 예술가의 창조의 기쁨에 비유될 정도다.

“포커나 고스톱은 돈을 걸어야 재미있죠. 돈을 안 걸어도 재미있는 게임은 바둑과 브리지 정돕니다. 어떤 것을 먼저 내고 나중에 내느냐 하는 순서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브리지는 바둑과 비슷해요. 그렇지만 바둑은 반상에 다 드러나니까 확률의 요소가 없는데, 브리지는 상대 패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상상력과 추리력을 동원하는 확률의 게임이죠. 바로 이 추리가 브리지의 묘미인데, 그걸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와 공조를 통해 이뤄낸다는 점이 묘미입니다.” 브리지 매니어로 유명한 프로바둑기사 김수장 9단의 말이다.

스마트폰을 주무르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타인과의 소통 방식조차 기묘하게 변해가는 오늘, 네 명이 둘러앉아 상대를 배려하고 협조하면서 정보를 나누는 방법을 깨쳐가는 이 고전적인 카드 게임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는 이 게임이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이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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