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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반상의 소크라테스’ 문용직, 그가 산에 든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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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우석
문화평론가

‘반상(盤床)의 소크라테스’로 불리던 프로 바둑기사 문용직(53) 5단의 근황을 그의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몇 해 전 바둑을 접었던 그가 출가를 결심했고, 벌써 수행 3년째라는 얘기다. 뜻밖이다. 하지만 엉뚱하게 들리진 않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남다른 의문을 품은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면 그럴 수 있는 게 아닐까. 문용직의 지인이 들려준 말에 따르면, 그가 프로기사 사직원을 한국기원에 제출했던 건 2008년 봄이다.

 프로기사에게 은퇴란 전례가 없기 때문에 기원 측이 놀랐다. 전전긍긍 하던 기원이 뒤늦게 사직원을 처리했지만, 문용직이 지리산으로 내려간 뒤다. 통산 318승(346패)을 거둔 프로기사가 왜 세상 인연을 정리했을까. 더구나 그는 재능이 많다. 바둑에 대한 학문적 접근인 『바둑의 발견 1.2』과 『주역의 발견』을 쓴 글쟁이로도 유명하다. 정치학 등 학문에도 관심이 많다. 이창호·이세돌 등이 대학 진학을 포기한 것과 전혀 다른 행보다.

 “용직이는 머리가 비상하죠. 지곡서당(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배워 원전을 좔좔 읽어요. 영어·일본어도 강하고요.”지인의 말에 따르면, 바둑 명문 충암고 출신인 문용직이 서강대에 진학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프로 선언(83년) 이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겸업’한 것도 그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만큼 고민도 컸다. 학위 딴 뒤 내심 기대했던 교수 자리가 주어지지 않자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혼도 했고, 우울증·고혈압은 물론 무병(巫病) 비슷한 것에도 시달렸다. 삶의 결단이 필요했다.

 바둑은 매력적인 도락(道樂)의 세계이나, 번뇌를 씻어주진 않았다. 그렇다면 오래 전 꿈인 수행을 실행할 때다. 문제는 절차다. 조계종은 50세 이전만 출가를 받아준다. 박현태 전 KBS사장도 그래서 태고종으로 출가했다. 입산을 결심한 마당에 그런 구분이 뭔 대수랴 판단한 문용직은 나 홀로 수행을 선택했다. 승적은 없지만 그는 엄연히 불자는 불자다. 그 사이 인도 여행을 다녀왔고 불교 책 수백 권을 읽었다. 용맹정진한 탓인지 건강도 되찾았다. 심란해지는 세밑, 문용직의 남다른 선택이 각별하게 음미된다.

 지인의 말 중 기억에 남는 게 이 대목이다. “한 명리학자가 용직이 사주를 보더니만‘딱 청담 스님 사주네’ 그랬답니다. 세상 인연을 끊기 전엔 어떤 일에도 정 못 붙이고, 고생만 하는 사주랍니다. 출가 밖에 길이 없다나요?” 왕왕 특별한 이들이 있다. 목사·신부 등 수행자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간에 사는 우리 몫까지 대신해주는 건 아닐까? 하지만 복잡한 시정(市井)의 한 복판의 우리도 수행자에 다름 아니다.

 삭발했건 아니건, 운수납자(雲水衲子)로 떠돌건 아니건, 그런 구분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 어쩌면 세상살이 자체가 수행 과정이 아닐까. 그런 우리 모습을 절묘하게 짚어낸 게 18세기 조선의 천재시인 이언진이다. “미칠 땐 기생한테 가고/성스러워질 때 불전(佛前)에 참배하네.” 우리들은 그렇게 성(聖)과 속(俗)을 오가며 때론 상처 받고, 작은 깨침도 얻는다. 그렇게 울고 웃다 보니 다시 한 해가 간다. 보름도 채 남지 않은 달력 몇 장을 말끄러미 바라본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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