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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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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영화 제목은 들으면 내용이 대강 짐작되게끔 짓는 법이다. 예를 들어 ‘왜 마님은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시는 것일까’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면, 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로영화겠구나, 라고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깜빡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유명한 코엔 형제가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였다. 제목만 보면 노인의 복지나 심리상태, 아니면 노년의 성(性) 문제라도 다룰 듯한데, 뜻밖에도 꽤 강렬한 폭력영화였다. 원작소설을 쓴 코맥 매카시는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산소탱크를 들고 다니며 무표정하게 사람을 마구 해치는 주인공을 통해 ‘순수한 악(惡)’ 내지 ‘절대악’을 그리려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좀 나이 든 보안관이 등장할 뿐 영화 자체는 노인 문제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은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구절 ‘저 곳은 늙은이들이 살 나라가 못 된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대한민국은 앞으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노인을 위한 나라’로 바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65세 이상 인구가 올해 535만 명, 전체인구의 11%라는데, 그들의 바로 뒤에는 무려 720만 명을 헤아리는 거대한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대기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5%에 달하는 베이비붐 세대 중 선배들은 이미 일터에서 물러나기 시작했고, 며칠 뒤 해가 바뀌면 은퇴 행렬이 또 꼬리를 물게 된다. 고용·복지·소비·연금·주택 등 모든 부문에 ‘베이비붐 폭탄’이 투하돼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게 틀림없다. 의료비만 해도 이미 전체 의료비의 30%를 차지하는 65세 이상 노인 의료비가 2019년에는 50%를 넘어선다고 한다.

 특히 주목하고 싶고 걱정되는 곳이 정치권 동향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정치권은 ‘720만 표’에 구애(求愛)하려고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무리수나 추태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70세 이상 노인에게 친환경 무상급식’ 같은 공약이 선거철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이미 조짐이 보인다. 2004년 총선 때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무대에서 퇴장할 분들이니까 이제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말했다가 큰 곤욕을 치른 게 기억에 새롭다. 가깝게는 김황식 총리가 ‘65세 이상 지하철 공짜’에 이의를 달았다가 물의가 일자 대한노인회에 사과하고,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에서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아야 했다. 경로당 난방비 지원 예산을 놓고 여야가 과거 정권 탓, 4대 강 탓이라고 치고받으며 노인층에 굽실거린 것만 봐도 정치권의 ‘노인 표 마케팅’은 갈수록 더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노인화(化)가 사회 곳곳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치권 포퓰리즘의 최우선 대상으로 등장할 때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감당할 능력이 있을까. 무상급식 논란에서 입증된 것처럼, 분명 다른 세대, 젊은 세대의 희생을 담보로 혜택을 받을 텐데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불과 7년 뒤엔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감소세로 돌아선다지 않는가.

 나도 그 한복판에 있지만, 결국 우리 베이비붐 세대가 어느 정도 양보와 희생을 감수해야만 할 것 같다. 자식 세대를 위해, 나라 전체를 위해서다. 지지리 고생만 하다 늙어버린 윗세대 덕분에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의 열매를 다소나마 맛보았다. 자기 이익만 앞세우지 않고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애국심도 갖춘 세대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가 중심을 잡고 서서히 ‘노인만을 위한 나라는 필요 없다’고 목소리를 낼 때가 아닐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