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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취재]쌈짓돈으로 산 무인도가 30년뒤 노다지 섬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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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에서 20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수려한 뱃길을 달리다 보면 5만평짜리 작은 섬 ‘외도’를 만나게 된다. 한산도·해금강 등 쟁쟁한 명승지들이 버티고 있는 한려해상 유람 코스 중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 곳. 거제도에서 출발하는 모든 유람선이 반드시 경유하는 곳이다. 그러나 ‘외도’는 국가가 개발한 관광지가 아니다.

1인당 입장료 3천원. 하지만 ‘외도’의 값어치는 결코 3천원으로 평가할 수 없다. 하루 입장객 수가 최소 3천명에서 2만명. 평균 5천명에서 1만명 수준이다. 날씨가 나빠 들어가지 못하는 날을 빼고도 이 작은 섬의 주인이 벌어들이는 돈은 웬만한 중소기업 매출액을 웃돈다. 게다가 부도의 위험도 없는 안전한 사업. 섬 안의 부대시설도 모두 섬주인이 직영한다.

‘외도’는 아열대 식물들과 꽃, 조각공원, 전망대 등이 있는 섬이다. 얼핏 듣기엔 하루 종일 아줌마들의 춤장단에 트롯트 음악이 꿍짝거리고,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시골 관광지 같지만 그러나 ‘외도’는 숙박과 음주가 금지된 문화지구다. 섬주인의 고집 덕에 정말! 금연·금주가 지켜지고 술·담배는 팔지조차 않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관광지다.

외국인들도 감탄하는 식물·조각 공원

맨발로 걸어다녀도 될 듯한 깨끗한 산책로, 모든 자재를 공수해 와 30억원을 들여 지었다는 예술품 못지 않은 건축물들(한 예로 남자화장실은 선 자세에서 바다가 보이도록, 여자 화장실은 앉은 자세에서 바다가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 희귀종의 식물들이며, 도대체 어떻게 외딴 섬까지 들어 왔을까 싶은 장식물들과 조각들. 외국인들도 감탄사를 연발하고 돌아갈 만큼 ‘외도’는 매력적인 섬이다.

그렇다면 쉼 없이 엄청난 수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수완 좋은 ‘외도’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외도해상농원의 주인은 뜻밖에도 교사 출신인 이창호·최호숙 부부다. 두 사람은 지금의 황금알을 낳는 섬 ‘외도’를 만들기까지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1969년 남편 이창호씨가 ‘외도’를 산 건 우연이었다. 당시 수학교사를 그만두고 제일모직 원단 판매상을 하던 그는 공격적인 판매전략을 구사해 전국의 도·소매상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원단을 팔았다. 그 시절 영업차 경상도 지역에 내려갔다가 업자들과 나섰던 접대 낚시중 거제도 앞바다에서 고기떼를 찾아 흘러들어간 곳이 ‘외도’였다.

당시 ‘외도’는 여섯 가구가 사는 외딴섬이었다. 전기·수도는 물론 통신수단도 없는 오지였다. 그가 들어가던 날도 비가 쏟아져 꼼짝없이 원주민 집에 갇히고 만다. 그 날 섬의 땅을 팔고 떠날 날만 바라던 원주민들은 서울 사람 이창호에게 섬을 사라고 사정한다. 한참 사업이 일어나고는 있었지만 외딴 섬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는 거절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섬의 청년 한 사람을 다음 날 서울 가는 그에게 딸려 보낸다. 본인이 살 수 없으면 친구라도 소개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6개월간의 승강이 끝에 그는 그때 돈 8백만원을 주고 섬의 절반 정도를 샀다. 그리고 다시 2년 만에 섬 전체를 사들인다.

문명이라곤 들어와 있지 않은 섬. 월남해 맘 붙일 고향이 없던 그는 ‘외도’를 제 2의 고향으로 만들어 보리라 결심하고 개척에 나선다.

감귤농원·돼지… 실패의 연속

첫 번째 도전은 감귤농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강추위가 몰아쳤다. 감귤나무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얼어죽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다시 도전한 것이 돼지 키우기였다. 새끼 밴 돼지 두 마리를 섬에 싣고 왔다. 돼지들은 기대한 대로 한없이 수가 불어났다.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농사 경험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료값이었다. 배 하나 가득 사료를 싣고 들어가도 돼지들은 하루 이틀이면 다 먹어치웠다. 날씨가 나빠 하루만 배가 못 들어가도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돼지 소리가 섬 전체를 덮었다.

그 난감한 지경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돼지 파동이 일어났다. 돼지값이 말 그대로 똥값이었다. 그는 돼지들을 인근 섬 주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주기로 결심한다. 눈물을 머금고 돼지들을 실어 떠나보내던 날 그는 배가 뒤집혀 죽을 고비까지 넘긴다. 실패는 그뿐이 아니었다. 사면이 바위인 섬에 선착장을 만들어 보려고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물이 나간 사이 바위에 겨우 시멘트를 발라 놓으면 파도가 들이쳐 휩쓸어 갔다. 그나마 한 달에 두 번 바닷물이 빠질 때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년에 걸친 사투끝에 기어이 선착장을 만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태풍이 불어 선착장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렇게 선착장을 날리길 4번. 그는 다시 선착장을 만들었다.

80년대 중반 새로운 희망이 보였다. 섬에서 자라는 동백나무를 가지치기해 팔며 기회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에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인근 해금강이 관광지로 각광받기 시작하며 근처를 지나던 배들이 들러 샘물도 마시고 쉬었다 가곤 했다. 그는 관광객을 주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 함께 섬을 가꾸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찾아들자 관광지로 개발

우선 아열대 식물을 사다 심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며 희귀한 식물들을 구했다. 직접 고속버스와 트럭으로 실어와 배로 날랐다. 서울대 사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최호숙씨는 독학으로 조경 공부를 시작했다. 청계천의 헌 책방을 돌며 외국의 정원이나 식물원을 보고 섬을 가꿔나갔다. 부부의 기대와 달리 식물들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온전히 바닷바람을 다 맞아야 하는 ‘외도’의 기후를 이겨내지 못했다. 사오는 식물의 3분의 2 이상이 죽어 나갔다. 그래도 또 사 왔다. 끝도 없는 싸움이 계속됐다.

두 사람은 외국까지 나갔다. 외국인에게 식물을 팔지 않는 곳에선 식물원을 돌며 씨를 훔쳤다. 그리고 돌아와 씨를 살려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식물들이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하자 이번엔 조각공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최호숙씨는 조각품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조각품을 ‘외도’까지 옮겨오느라 4번이나 팔이 부러졌다.

섬에 대해 자신이 생기자 부부는 관광지구 지정을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다녔다. 허가가 떨어지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2년 만에 떨어진 허가는 ‘문화지구’.

본격적으로 개원을 하기 위해선 화장실·관리실 같은 시설들을 지어야 했다. 장고 끝에 유명한 건축가를 수소문해 만든 설계도를 들고 소관부처를 찾아갔다. 소관부처에선 달팽이처럼 생긴 설계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통나무’집을 지으라고 했다. 지중해식 건축물을 지으려던 부부의 꿈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부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또 다시 2년 동안 승강이를 벌여 원하는 대로 건축허가를 받아냈다.

건물짓는 데 들어간 비용은 1차로 15억원. 2차로 다시 15억원이 들었다. 95년 건축물이 완공되고 드디어 개원을 했다. 대통령부터 인근 섬주민에 이르기까지 초대장만 몇천 장을 보냈다. 하지만 폭풍우가 불어 초대한 손님들은 섬에 들어가지 못했다. 끝까지 절망의 연속이었다.

개원 후의 성공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에 1만 명씩 손님이 들어왔다. 온 섬이 들썩들썩했다. 섬은 곧 관광객들의 트롯트 음악과 고기냄새, 술냄새, 담배연기로 뒤덮였다. 유람선에서부터 술에 취한 관광객들은 술을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다.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던져 식물천지인 섬이 송두리째 타버릴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부부는 플래카드를 걸고 머리띠를 두른채 금주·금연 캠페인에 나선다. 소란을 피우는 관광객들은 입장료 3천원을 돌려주고 가차없이 내보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섬은 제 모습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관광객들과의 싸움도 줄어들었다.

이창호 회장은 ‘외도해상농원’을 개원하며 사업도 정리하고 ‘외도’에 몰두하고 있다. 월남해 오직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고생끝에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수학교사를 하다 지독한 가난이 싫어 사업에 뛰어들었던 이회장. 30년의 절망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그에게 ‘외도’는 삶 그 자체이다.

고혜림 자유기고가
이코노미스트(http://economist.joongang.co.kr) 제 507호 199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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