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끝난 중3·고3학생 전환기 프로그램에 가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아~아아~~” 경기도 광주시 서울시 학생교육원 퇴촌 야영장에 때아닌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두터운 케이블에 누군가 대롱대롱 매달려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퇴촌 야영장에 타잔이라도 나타난 걸까.

인공암벽타기·짚라인 등 야외 코스 갖춰

6일 오전 10시30분 퇴촌 야영장 앞에 4대의 버스가 멈춰섰다. 패딩점퍼를 껴입은 채 어깨를 잔뜩 움츠린 학생들이 줄줄이 버스에서 내렸다. 학생들은 “추워요” “집에 가고 싶어요”를 연발했다. 기온은 섭씨 3~4도로 아주 낮지는 않았지만, 해발 556m의 관산 기슭에 위치한 야영장은 산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매서웠다.

서울시교육청은 입시를 마친 중3·고3 학생을 대상으로 퇴촌 야영장에서 ‘2010 서울 학생 놀이문화교실’을 운영했다. 수능과 기말고사 후 수업 집중도가 떨어지는 학생들을 위한 전환기 프로그램이다. 학급단위로 참가할 수 있으며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0일까지 하루 4개 학교 168명씩 총 32개교 1344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인공암벽타기, 모험활동, 짚라인같은 야외활동과 비누 만들기,공예품 만들기 등의 실내활동이 준비됐고,각 코스별로 전문강사가 활동을 도왔다.

교실 밖에서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경험

“못 뛰겠어요. 저는 절대 못 뛰어요.” 헬멧을 쓰고 자일을 온 몸에 주렁주렁 단 한 여학생이 8m 상공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뛰어내리라는 교관의 설득도 소용없는 모양이다. 기둥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상하야, 넌 할 수 있어, 용기를 내.” 함께 올라가 있던 친구들이 격려를 거듭하자 이상하(서울 상경중 3)양은 눈을 질끈 감고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쳤다. 그러더니 어느새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 머리 위를 쏜살같이 지나 120m를 활강했다. 이양은 양 볼이 빨개진 채 함박웃음을 지었다. “못할 줄 알았는데 제가 해냈어요.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처음입니다.”

조예진(서울 상경중 3)양은 “기말고사도 끝나 요즘은 학교에서 잠만 잤다”며 “추운날씨에 여기 오기 정말 귀찮았지만 막상 나오니 교실에 있는 것 보다 훨씬 신난다”고 말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만 해도 ‘나 억지로 끌려왔소’ 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학생들의 표정은 도착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즐거움으로 가득찼다. 김동철(서울 상경중) 교사는 “중3은 2학기 기말고사 끝나고부터 방학 전까지는 동기부여가 안돼 수업지도에 애로사항이 많았다”며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교실 밖에서 체험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발만 더, 한 발만 더 디뎌.” 15m 높이의 암벽을 오르는 친구들을 응원하는 소리로 암벽장은 시끄러웠다. 친구가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졌다. “땡땡땡-” 끝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한 학생이 암벽 꼭대기에 매달린 종을 치자 응원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졌다.“올라갈 땐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종칠때의 짜릿함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유종욱(서울 성수공고 3)군은 “수시에 합격해 더 이상 목표의식이 없었다”며 “도전하고 이뤄낼 만한 것은 무궁무진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함께 활동하니 단합도 더 잘돼

야영장 한쪽에서는 학생들이 계곡 위에 쳐진 그물을 엉금엉금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아래 바위투성이 계곡에 떨어질까 싶어 아찔했다. 양인숙(서울 창일중) 교사도 반 학생들 틈에 섞여 함께 그물을 건넜다. 무서워서 제자리에 멈춰있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기도 했다. 삼각로프와 발아래와 머리위로 지나가는 밧줄 2개에 의지해 얼음물이 굽이치는 계곡도 탐험했다.

김지은(서울 창일중 3)양은 “밖에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니 그동안 멀게 느껴졌던 선생님이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며 “코스중간 중간 사진을 함께 찍고 교실에서 못 다한 대화도 나누니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더 친해졌다”고 말했다. 함께 하는 놀이 활동이 사제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든 것이다.

프로그램은 실내에서도 진행됐다. “라벤더 향은 몸과 마음에 쌓인 피로를 씻어주는 효과가 있어요. 로즈마리 향은 집중력 향상을 도와주죠.” 비누 만들기 수업이 한창인 교실. 학생들이 직접 비누를 만들기에 앞서 지도사가 설명해주는 향료의 효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원하는 향료를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가운데 좋아하는 색의 기름에 붓고 글리세린을 섞은 뒤 틀에다 부었더니 비누가 완성됐다. 학생들은 “노랑보다는 초록이 더 예뻐”“난 요즘 피곤하니 라벤더 향료를 넣어야겠어” 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노수민(서울 창일중 3)양은 “공부말고 다른 것을 배워본건 정말 오랜만이다”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여가시간에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후 3시30분이 되자 프로그램이 모두 끝났다. 학생들이 타고 온 버스 4대가 야영장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쉬워요.” 진행된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공예활동 시간에 만든 휴대폰 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양다민(서울 상경중 3)양이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나도, 나도”라며 말을 받았다. 조예진(서울 상경중 3)양은 버스에 올라타며 “학원 갈 생각을 하니까 답답하지만 오늘 받은 힘으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말했다.

[사진설명]경기도 광주에서 열린 2010 서울 학생 놀이문화교실 현장. 케이블에 매달린 채로 8m 상공에서 120m를 활강하는 ‘짚라인’을 타는 학생의 표정이 밝다.

< 설승은 기자 lunatic@joongang.co.kr / 사진=김진원 기자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