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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정부 핵심 참모 3인의 경제관 - 이헌재 금감위원장

중앙일보

입력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역시 여느 관료와 마찬가지로 시장에 대한 기본적 불신을 갖고 있다. 시장경제적 질서, 즉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해서 자신의 이익을 찾아감으로써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시장의 질서를 그는 내심 무질서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보다. 일견 표면적으로 시장(의 역할)
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위원장의 이러한 견해는 현재 한국의 시장은 부서진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시장은 스스로 붕괴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시장에 개입하는 정부 권력에 의해서만 시장이 붕괴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금융 시장의 경쟁력 저하나 재벌의 형성 역시 정부가 시장의 진화를 방해한 결과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식이 관료 사회에 자리잡지 않는 한, 항상 시장 파괴의 주체, 즉 정부가 다시 시장을 복구하는 주체로 나서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시장경제관

이위원장은 시장주의자를 자처한다. 관료로서 출발했으나 일반기업에서 오랫동안 일해본 경험 때문인지 다른 관료들보다는 훨씬 기업에 대해 우호적이고 유연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음은 시장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위원장이 금융개혁에대한 기본입장을 밝힌 내용이다.

"(편집자 주: 금융기관, 기업 구조조정에 대해)
앞으로 금감위가 이래라 저래라 지 않겠다. 시장원리에 의해 모든 것이 이뤄지도록 해달라."('금융감독조직 6월까지 개편', 1998년 4월 12일 한국일보, 경제)
그러나 이위원장은 기본적으로는 다른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시장을 믿지 않는다.

시장에 대한 불신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적 이기심을 원리로 해 자연스럽게 공익에 기여한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에 대해 그는 불신을 표현한다. "어쩌면 사적동기의 추구에 기초하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경제주체의 양심에만 내맡기기에는 그 작동은 심히 불완전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뻔한 이익을 앞에 두고도 종종 시장에서의 실패를 목격하곤 한다.

워크아웃은 채권 금융기관들의 약속을 전제로 한 기업구조조정의 한 과정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사적 이기심의 유혹은 강해진다. 그래서 워크아웃도 실은 우리 마음 내부에서 어려움이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국가경제 회복이라는 대승적인 목표를 향해 경제시스템을 깨뜨리는 천박한 이기주의를 버려야 한다."('워크아웃과 기업 구조조정', 국민일보 칼럼)

시장의 기능에 대한 기본적 불신은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특히 위기라고 하는 때 정부의 시장개입은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시장이 작동하지않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여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쉽게 대중들의 지지를 얻으며, 시장은 경제 위기의 주범이나 그 속죄양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시장은 그 작동이 심하게 제한될 수 있으며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다. 이위원장도 이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편집자 주: 최근 정책이 시장기능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시장기능에 따라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그러지 않아야 하는 때도 있다. 시장이 완전히 부서진 상황에서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직접 개입하고 어떤 때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간접 개입한다."('이 금감위장 경영전략硏 강연', 1998년 5월 21일, 경향신문 경제)

그러나 시장이 망가지는 때는 정부가 막강한 권력으로 시장의 작동을 지속적으로 억압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시장의 작동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는 민간 경제 주체가 아니라 정부 권력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장의 작동을 위한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하면 시장은 파괴되지 않는다. 즉, 재산권을 정의하고 보호하는 일, 자발적인 계약이 잘 이행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일, 타인의 폭력과 외침으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만을 수행한다면 시장은 자유롭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파괴되지 않는다.

따라서 위기 상황에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은 시장을 파괴로 인도한 원인 제공자인 정부가 다시 문제의 해결사로 나서겠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설사 시장이 파괴되었다고 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가장 효율적으로 복구시킬 수 있는 힘이 시장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대안 중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는 것이다. 시장은 기본적으로 거래자 상호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에 파괴된 시장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빠른 속도로 복구해 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흔히 파괴된 시장을 복구하는 주체로 정부가 거론된다. 그러나 정부가 파괴된 시을 제대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수많은 정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시장이 파괴된 원인, 파괴된 정도, 그러한 상황에서 각 경제 주체들의 행동 양식, 그리고 적절한 대책 등 정부 관료가 알아야 할 정보는 매우 방대하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양의 정보를 정부 관료가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위기 국면을 정부가 가장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은 스스로 그 한계점을 노출하게되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단기적인 목적 때문에 이러한 시장의 복구 과정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점이 문제이지, 시장이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시장은 비인격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위원장은 사적 이기심에 내맡겨진 자본주의의 작동이 매우 불안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시장에서 익명의 사람들이 사적 이기심에 입각하여 행동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자생적인 경제질서가 형성된다. 오히려 국가 경제 회복이라는 이름하에 정부가 개입할 경우 필히 자의적인 자원 배분에 따른 경제질서 파괴가 잇따른다.

◇금융개혁에 대해

이 위원장의 금융개혁에 관한 견해는 일면 자율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부가 가이드라인 정도를 제시해야 할 필요를 시사하고 있다. 이 위원장의 발언 내용을 들어보자.

"(편집자 주: 은행더러 알아서 하라 해놓고 너무 개입하는 것 아닌가)
금융계의 현실이 어떤지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않습니까. 또 개별은행간의 이해가 얽혀 갖가지 반발이 얼마나 심합니까. 이런 마당에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방향설정을 분명히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모든 걸 알아서 하라고 방치하면 개혁은 부지하세월입니다. 내 양심에 비춰 이 정도까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합니다. 워낙 긴급 피난적인 행위가 많기 때문에 개입과 자율을 딱 잘라놓을 수가 없습니다."('구조조정 전도사', 1998년 7월 13일, 중앙일보 인터뷰)

금융기관의 구조 조정을 논하기 전에 먼저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부실화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의 금융은 이른바 관치금융이었다. 관치금융의 가장 두드러진 원인은 금융기관의 소유권이 민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부에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정부가 경제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금융 자원을 자의적으로 배분해 왔으며, 그런 목적을 위해 민간의 금융기관 소유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자율적인 심사 기능은 퇴화되고, 정부의 산업 정책에 따른 강제적인 대출이 금융산업의 퇴보와 부실화를 초래하였다. 금융기관 부실화의 원인이 관치금융에 있었던 만큼 금융 산업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관치금융의 관행을 제거해야만 할 것이다.

관치금융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관치금융의 원인이었던 금융기관의 소유, 인사 등에서 정부 개입을 배제하고 민간의 금융기관 소유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선회되어야 한다.현재의 문제는 사실상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금융개혁이 장기적으로 효율적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한시바삐 금융시장을 정상화하여 국제 신인도를 높이고 기업 구조 조정도 순조롭게 진행시켜야 한다는 유인을 강하게 느끼겠지만, 과연 그러한 방법이 가장 나은 방법일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문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원론에 충실한 방법을 택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정부 개입은 또 다른 관치금융의 폐해를 낳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법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라면 최선의 방법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금융시장도 시장인 만큼 경제 주체들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화하도록 하여 금융 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금융기관의 통폐합도 정부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을 제시하고 권고하되, 구체적인 사항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금융기관들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위원장의 금융개혁에 대한 견해는 일면 수용할 점이 있다고 판단된다.

◇빅딜에 대해

빅딜에 대한 이위원장의 발언은 교묘하게 원론적 입장과 개입 가능성을 넘나들고 있다. 노골적으로 정부개입을 주장하지는 않고 있으나 빅딜이 필요한 업종을 거론하거나 은행을 통한 재제를 언급하는등 사실상의 정부주도를 인정하고 있다. 다음은 이위원장의 빅딜관련 발언들이다.

"(편집자 주: 자동차업종 빅딜에 대해)
특정업체를 거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시장과 언론에서 경쟁력 없는 업종으로 가장 많이 예를 든 업종이 자동차산업이다. 산업전반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편집자 주: 재벌의 중복사업부문에 대한 빅딜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며)
현대·쌍용·LG·SK·한화 등 5개업체가 과열 경쟁하고 있는 정유업계의 사업 교환이 필요다."('정유업계 빅딜을', 종합

SBS 생방송 1백분 대토론회, 1998년 7월 9일 조선일보 보도)

"재계의 자율적인 구조조정방안이 당초 기대보다 미흡하고 국민들이나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준에 이르기를 무한정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다. 재계의 (빅딜에 대한)
발표내용은 과도한 부채구조와 중복·과잉투자 해소, 산업경쟁력 제고라는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5대 그룹 자율 빅딜 안되면 정부 강제구조조정', 1998년 10월 8일, 한국일보 )

"5대 그룹 개혁은 야생마 길들이기와 같다. 야생마에 바로 안장을 얹으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 먼저 높은 담과 넓은 마당에 몰아넣고 그 안에서 길들여야 한다. 5대 그룹에 대한 회사채·기업어음·은행대출 제한 등이 그런 과정이었고 이제는 안장도 놓고 고삐도 맬 단계가 된 만큼 5대 그룹 구조조정도 조만간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1998년 11월 26일 KBS라디오 인터뷰)

"(편집자 주: 정부가 빅딜을 강요하면서 그 과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불평에 대해)
그렇지 않다. 단지 산업자원부 장관이 10개 업종의 시설과잉이 심각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재계간담회에서 이런 입장을 밝혔을 뿐이다. 빅딜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추진하기로 했을 뿐이다. 5대 그룹의 과잉시설을 스스로 인정했다. 이런 취지에서 7개 분야의 빅딜을 추진하기로 했다. … 정부는 지금까지 구체적인 사안에 개입한 적이 전혀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편집자 주: 끝까지 빅딜이 성사되지 않으면 정부가 할 일은)
정부가 직접 나서 할 일은 없다. 단지 금융기관을 상대로 제재를 할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최종적인 결정은 채권 금융기관들이 해야한다. … 과잉시설을 유지하는 상황에선 기업이 어려워질 것이고, 결국 그 부담은 금융기관에 돌아갈 것이다. 정부는 만약의 경우 금융기관이부실하게 되면 국민들의 세금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부실화되지 않록 감독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빅딜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1998년 12월 30일, 주간매경, 대담)

빅딜은 재벌간에 사업을 교환함으로써 경쟁력 향상을 통해 수익성을 제고하여 나라 경제를 튼튼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강제적인 빅딜은 첫째,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인 사적 재산권의 침해이고, 둘째, 이해 당사자간의 자적인 거래가 아닌 정부에 의한 강제적인 거래라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주식회사는 하나의 재산권의 형태로서 시장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소액 주주들은 지분을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주주, 즉 기업의 사실상의 주인(effective 또는 de facto manager: 한국 재벌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지분을 많이 가진 재벌의 총수가 최고 경영자인 우가 대부분임)
에게 경영을 위임한 것이며, 이들 경영자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한 행위를 할 경우에는 소유 주식을 팔고 떠남으로써 경영자의 행위를 견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재벌의 회장을 사실상의 주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들이 사실상의 주인이 아니라고 백 번을 양보하더라도 자발적인 거래를 위해서는 모든 주주들에게 빅딜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빅딜은 사유 재산권 해임에 틀림없다.

또한 빅딜을 위해서는 교환 대상 회사의 자산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데, 각 기업이 평가하는 자산 가치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자발적인 교환이 아닌 강제적인 빅딜은 서로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보다는 어느 일방에게만 이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과연 경쟁력이 높아져 한국 경제의 회생이 도움이 될지 아니면,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에 빠뜨릴지 아무도 단호하게 말할 수 없다.재벌은 시장이 미발달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경제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한 산물이다. 진화의 산물을 인위적으로 해체하자는 주장은 위험하다. 또한 현재 재벌을 해체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회생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기업간 경쟁을 유발하고 전문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행하는 갖가지 산업정책을 폐기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업종 전문화 정책을 시행할 것이 아니라, 기업간 경쟁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면 기업은 당연히 비교우위에 입각한 특화를 해 나간다. 그렇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한 개의 재벌이 많은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효율적이라는 말이 되므로 당연히 용인되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재벌의 업종 전문화도 인위적인 산업 정책보다는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전문화가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중소기업관

"은행에서 중소기업 지원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은행마다 중소기업처리 전담반을 구성해서 지원토록 해야 한다."('경제대책조정회의 발언내용 요약', 1998년 3월 27일, 한국경제, 정치)

"(편집자 주: 시중은행장과 조찬간담회에서)
은행들이 고객중 건실한 중소·중견기업을 보호하고 살려야만 자신이 사는 길이다."('기업 빚 은행출자 전환 땐 주주 소유·경영권 뺏겠다', 1998년 5월 14일, 한국일보, 종합)

"5대 그룹 등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걸맞는 봉제, 영화관 운영, 캐터링(출장급식)
업종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기업이 이같은 업종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 채권은행의 역할이다." "은행 직원들이 금융구조조정 때문에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꺼려 중소기업지원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평가기준을 대폭 하향조정하고 은행별로 중소기업 전담역을 신설,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5대 그룹 中企 업종 손떼라', 1998년 9월 17일, 한국일보 종합)

이 위원장의 발언을 살펴보면 중소기업의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중소기업 따로, 대기업 따로의 사업 영역이 있다는 암묵적인 가정은 논리적인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실제로 어떤 시점에 어떤 산업에는 중소기업만 있는 경우가 있으며, 반대로 대기업만 있는 경우도 있다. 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혼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산업의 기술적 또는 판매적 특성, 그리고 시장의 발달 상황이 기업의 크기를 결정한다. 시장에서 생존경쟁에 직면한 기업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을 잘 찾아내지 못하면 경쟁에서 도태되고 만다는 것을 기업가는 누구나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시장 상황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산업의 상품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반대로 다른 산업의 상품에 대한 수요는 감소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중소기업이 잘 해오던 곳을 대기업이나 재벌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시장이 변하였거나, 그러한 역에 들어감으로써 제3자인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효율성이 생기기 때문이다.이러한 효율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경영, 판매, 기술 등이 여기에 포함되고, 재벌의 경우에는 재벌 자신이 쌓아온 명성과 상품 브랜드가 여기에 속한다.

예를 들면 소비자가 상품을 고를 때 충분한 정보가 없는 경우에도 어떤 재벌의 로고만 보면 대강의 품질과 상품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재벌의 소위 문어발식 영역 확장은 명성과 성가(good will)
를 여러 업종에 이용한 결과이다. 또는 시장이 협소하면 전문화가 좋은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시장이 기업의 투자 방향과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위주가 될 것인지 아니면 중소기업 위주가 될 것인지는 시장에 맡겨야 할 것이다.기업은 이윤만 남으면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경쟁의 자유 또는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재벌과 중소기업이 경쟁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경제를 만들고 국민은 그러한 경쟁이 없을 때보다 값싸고 품질 좋은 상품을 사용할 수 있다. 중소기업을 이런 방법으로 보호함으로써 오히려 경쟁력이 더 감소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금융기관이 제도적으로 중소기업 대출을 뒷받침함으로써 중소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위에서 설명한 내용대로 그 정당성을 찾기가 어렵다. 이는 또 다른 관치금융을 낳을 수밖에 없으며 금융기관 부실화를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중소기업에 대출할 것인가 아니면 대기업에 대출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은행이 위험 조정된 수익성(risk adjusted profit)
에 입각하여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재령 월간중앙 차장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7호 19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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