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최재천(56)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지만 인문학 관련 활동도 왕성히 한다. 그는 강연 때마다 21세기형 인재는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형인재’라고 강조한다. 지난달 18일 오전 이화여대 종합과학관 연구실에서 최 교수를 만나 미래 인재상과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통섭형인재’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통섭형인재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거침없는 공동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춰야 한다. 21세기 초고령화 시대엔 일생 동안 70여년을 일해야 한다. 직업 1개로는 버티기 힘든 시대다. 첫 직장을 40대에 나와도 전공이나 경력과 무관한 새 직종에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축구선수 박지성이 통섭형 인재의 전형이다. 수비를 전문으로 하다가도 상황에 따라 공격수 역할도 제대로 해낸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 됐을 때 그 분야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며 언제, 어떤 부분이든 해내는 사람이 각광받는다.”
-그렇게 키우려면 부모는 자녀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기초를 두루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통섭이란 어느 한 분야에 매몰 되는 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이론이 함께 얽혀 새로운 이론체계를 찾아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다양한 분야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과학에 흥미가 없다면 과학과 친근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과학전람회도 자주 다니고 과학적 흥미를 돋우는 게임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직업을 여러 번 바꿔야 할지 모르는 미래에 수학·과학과 전혀 관련 없는 직업만 택할 순 없다. 사회에 나왔을 때 과학 분야가 너무 낯설어 접근도 못하고 막막해 하면 안되지 않나. 자세한 원리는 몰라도 ‘어릴 때 잠시 기웃거렸는데’하며 과감히 도전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 반대로 인문학에 관심이 없다면 그 쪽에 친근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글 조금 못쓴다고 이과 쪽 교육만 하고, 수학 조금 못 한다고 문과쪽 교육만 하면 ‘멀티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자녀를 키울 때 무엇에 가장 중점을 뒀나.
“틈 날 때마다 책을 읽어줬다. 미국 유학시절 아들을 낳았다. 교회에서 만난 미국인 할머니가 아이를 보러왔다. “백악관에선 요즘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며 정치 얘기를 갓난아이에게 한참 하는거다. 어안이 벙벙한 우리 부부에게 “애가 못알아듣는 것 같지. 다 듣고 있다 커서 오늘 들었던 걸 부모에게 말해줄 수 있어”라고 하더라.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 시간이 나면 책을 읽어줬다. 논문을 쓰다가도 논문내용을 읽어줄 정도였다. 아이가 세 살 때였다. 아이에게 밤에 책을 읽어주다가 내가 잠이 들었다. 말소리에 눈을 뜨니 아이 혼자 책을 읽고 있더라. 글자는 모르지만 그동안 하도 읽어주니 내용을 줄줄 외고 있던 거다. 그 후 도서관에서 책을 부지런히 빌려다 읽어줬다. 5살이 되니 혼자서 책을 자연스레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대학에 가기 전까지 300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자녀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부모들이 많다.
“부모들은 극장을 방불케 하는 스크린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에게는 ‘넌 왜 책을 안 읽니’하는게 문제다. 먼저 거실 TV부터 없애라. 부모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같은 책을 읽어도 좋고 다른 책을 읽는다면 서로 읽은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독후감을 쓰라고 강요해선 안 된다.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대신 아이가 신이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독서활동 내용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응해줘야 한다. 나는 내 특기인 성대모사를 이용해 독서를 지도했다. 동물, 특히 물개소리만큼은 독보적이다. 아이가 좋아했던 디즈니 동화를 내가 구피를 흉내내고 아들이 도널드 덕을 흉내내며 신나게 함께 읽어나갔다.”
-과학자인데도 글 실력이 대단하다. 베스트셀러도 여러 권이고 고교 국어교과서에 글이 실렸다. 비결이 뭔가.
“책을 많이 읽었던 게 도움이 됐다. 분야는 가리지 않는다. 연구실에도 4000권 쯤 책이 있고, 집에도 2000권 정도 있다. 글 쓸 때는 계속 소리 내 읽어본다. 부드럽게 읽힐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일찍 글을 완성하지만 오히려 고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고쳐쓰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청소년들에게 통섭과 관련해 추천하는 책이 있다면.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다. 인류의 역사를 총·균·쇠 3가지로 재해석했다. 원래 생물학자인 저자가 인문학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힌 셈이니 바로 통섭의 전형이다. 이 책으로 통섭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연구실에 중고생들도 있다던데.
“‘벌레가 좋다’ ‘동물을 좋아한다’며 들락거리는 중고생들로 연구실이 늘 붐빈다. 지난 3년간 3~40명의 중고생들이 왔다갔다. 자유로운 통섭의 현장에서 놀며 연구한다. 함께하고 싶은 학생은 이메일로 약속만 정한 후 연구실로 ‘쳐들어’오면 된다.
-평생의 멘토가 있나.
“대학에 들어와 원하지 않는 전공을 하게 돼 방황을 많이 했다. 대학 4학년 때 연구 차 한국에 온 미국 유타대 조지 에드먼즈 교수를 우연히 만나 5일 간 조수역할을 했다. 곤충 ‘하루살이’ 연구를 하러 세계 100여국을 다녔다는 말을 듣고 난 내 미래를 봤다. 그 분처럼 되고 싶어 미국 유학도 결심했다. 결국 하버드대로 진학 해 동물행동학 최고 권위자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제자가 됐다. 윌슨 교수는 통섭 개념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섭적으로 학문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에드먼즈 교수는 우연히 내게 왔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행운이 오는 것은 아니다. 나서서 찾아야 한다.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많이 읽고 그 분야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평생의 멘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쁜 시간을 쪼개 최대한 강연을 다니려는 것도 그 이유다. 혹시 내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두 명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실제로 그런 학생이 나왔나.
“박영철 교수는 애초 분자생물 전공이었다. 석사 때 내 수업에 들어와선 ‘반짝 반짝’ 눈을 빛내더니 어느날 불쑥 찾아왔다.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이제야 찾았다’며 전공을 동물행동학으로 바꿔 내 연구실로 왔다. 전공을 바꿨을 때가 이미 대학원생이었으니 공수 전환에 능한 ‘통섭형 제자’가 맞다. 지금은 강원대에서 바퀴벌레를 연구한다.” (최교수는 ‘바키연구합니더’하고 제자의 말투를 사투리까지 정확히 성대모사했다. 과학 뿐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천장까지 가득 찬 연구실에선 인터뷰 내내 유쾌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최재천 교수=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자이면서 인문서적도 쓰고 신문에 칼럼도 연재한다. 그가 쓴 글은 고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인간과 동물』『알이 닭을 낳는다』『개미제국의 발견』등 그가 쓴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서울대 동물학과를 나와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를 거쳐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교수는 학문간 경계를 허물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자는 통섭의 개념을 한국에 소개한 인물이다.
[사진설명] ‘통섭학자’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가 자신이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책 『통섭』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설승은 기자 lunatic@joongang.co.kr 사진="김경록">설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