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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그물로 건진 삶의 서정-김명인 새 시집 '길의 침묵'

중앙일보

입력

"친구가 실직을 하였다,나이 쉰에/달린 식솔이 넷,무얼 먹고 사느냐고/새해 들어 첫눈 내리는 날,/사막 건너로부터 기별이 왔다,한 장 담요를/허공에 띄우는/그들식의 아라비안 나이트,//마침내 기적을 이룬 것이다,눈이 내리면/서역으로 떠나는 확실한 낙타 편이 예약된다/만나가 길이며 지붕을 채곡채곡 덮어버리는/풍성한 지상에서는/제 순대를 길게 끌고 가는 저기 불자동차들,/이제 추위를 저장하는 냉장고 따윈//필요치 않을 꺼에요…"(시'실직'중·만나:성서에 나오는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

현실에서 출발,현실 너머의 아름다움을 응시하는 '강인한 서정'의 시인 김명인(53·고대 문예창작과 교수)
씨가 새 시집'길의 침묵'(문학과지성사)
을 펴냈다."열목어의 눈병이 도졌는지,아버지는/무슨 생각으로 나와 내 漁撈(어로)
가 궁금해지신다"(시 '아버지의 고기잡이'중)
라며 그물질을 하던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는 시인의 고향은 경북 울진 바닷가 마을.이제 시인은 양복차림에 도시인이 되어있지만,'생활·현실·인생'이라는 바다에 시(詩)
의 그물을 던지는 시인의 업 역시 그물질이기는 마찬가지다.특히 그의 그물에는 반세기를 살아온 동년배들의 녹록치 않은 서정이 암염(巖鹽)
처럼 걸려올라온다.

"식도에 탈이 났다,밥을 삼키던/식도,뜨거운 국물이 흘러들어갈 때,그 언저리 어디에서 시큰거리는 통증 솟아올라/나도 이제 건널 수 없는 강 하나 몸 속으로/펼쳐놓은 것일까…무엇 하나 축적시키지 못한 모래 시간들 쏟아놓으면/식도는 단순히 지내가는 관이었을까,/밑 빠진 식욕을 채우느라/무던히도 삽질해 보낸 한 세상의 노역 새삼스럽다…텅 빈 저 아래의 위장을 십이지장을 그 먼 공양길들을/비틀거리며 지나갈 취객 하나를/식도는 이제 거부하려 한다"(시'식도'중)

올봄 갓 등단한 신세대 평론가 김수림씨가 이번 시집 해설에서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먹는 일의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라고 짚어낸 대로,시인은 6·25전후의 곤궁한 시대에 유년기를 보낸 세대.여기에 내핍과 자기희생과 고도성장의 청년기를 보낸 시인은 특유의 자기절제 강한 성찰적 시선으로 현실과 현실을 초월하는 미학 사이에 긴장의 다리를 놓는다.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시인이 첫시집'동두천'을 내놓은 것은 동두천지역에서의 교사생활과 월남전 파병을 체험한 이후인 80년.그 후 "내 스스로의 길이 보이지 않아"8년 가까이 시집을 내놓지 않았던 기간을 보상이라도 하듯,시인의 90년대는 누구못지 않은 활발한 시작(詩作)
기간으로 기록된다.올해 들어서만도 40여편을 발표한 왕성한 창작욕은 그가 "빨강·파랑·노랑 신호등 머리"의 문예창작과 학생들 못지 않게 활력에 가득차 있음은 확인시킨다..

그런 시인이 이번 시집에 자신의 오랜 모티브인 '길'에 '침묵'을 붙인 제목을 내건 것은 왜일까.그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나 역시 이번 시집이 '새로운'시집이기를 바란다"면서 습관적으로 시를 쓰지는 않겠다는 결의가 들어있음을 설명한다.거기에 덧붙여 시인은 "시든 인생이든 '한바탕 잘 놀고 가는 것'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면서 "현실의 파문이 마음의 가장자리까지 미치는 시,사유가 사물에 녹아드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남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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