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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24)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밝은 눈 4

“유리창의 얼룩! 더러운, 앞을 가리는 얼룩요!”
찢겨져 나온 드레스 자락을 검투사는 제단 앞으로 던졌다. 찢어진 드레스 뒤에서 소녀의 본래 모습이 나타났다. 소녀는 소녀다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쪽진 머리를 풀고 나자 생머리가 어깨에 닿았다. 키드득 하고 소녀가 한 차례 장난스럽게 웃었다. 거리에서 얼마든 만날 법한 평범한 인상의 소녀였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사람들을 향해 돌아선 검투사의 눈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똑바로들 봐요! 이 아이가 관음보살입니까!” 낮았으나 찌렁찌렁 울리는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보시는 것처럼, 이 아이는 그냥 소녀에 불과해요!. 중학교 이학년 계집아이요! 진여(眞如)란, 지극히 고요하고 지극히 밝으며 온갖 선악을 초월한 곳에 있다는 걸 왜들 모르세요? 만병은, 그래요, 다 진여에 이르지 못한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유리창에 얼룩이 가득하면 참을 볼 수 없는 게 당연한 이치인즉, 그 얼룩을 닦아야 절로 참이 보인다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아이는 관음보살이 아니오. 이 아이는 가짜요! 얼룩이요! 허깨비다 그 말입니다! 관법(觀法)의 으뜸은 번뇌로부터 자유로움을 얻는 것인즉 여러분이 가진 그 집착, 그 얼룩이 이 소녀를 관음보살로 보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마음을 개벽해야 몸이 개벽돼요. 마음자리를 닦고 닦아 얼룩을 지우면 병은 절로 물러나게 돼 있어요. 이 아이에게서 관음을 찾지 마세요. 관음(觀音)은 하늘의 소리이니, 마음으로 들어야 들리는 겁니다. 자, 여길 한번 모아보세요.”

검투사가 자신의 이마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석가모니불의 이마 중간에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거 보셨지요? 여기가 바로 의식을 모으는 인당혈입니다. 얼룩을 닦아 심신이 맑아지면 여기에서 관음이 자연스럽게 솟아납니다. 두뇌가 인체를 총괄하고 있으나 일상에서 대뇌의 활용도는 육 퍼센트에 불과해요. 현대의학이 아는 것도 따져보면 인체의 육 퍼센트밖에 안된다는 뜻이지요. 이런 허깨비 드레스에 속아 관음보살이다 생각하는 한, 몸이 청정한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겁니다. 밝은 눈을 가지세요! 명안(明眼)을 가지세요! 눈이 열려야 참을 볼 수 있고 참을 본다면 관음보살님 세지보살님의 현현을 저절로 다 보게 돼 있어요. 만병은 모두, 여러분 자신, 여기 들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아프다, 외롭다, 슬프다, 미웁다, 다 여기 들어 있어요!”

검투사의 주먹이 당신 가슴을 탁 쳤다.
경악했던 사람들 사이로 소녀가 나타났을 때와 차원이 다른 새로운 감동의 파장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듣는 말일 테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한 울림을 가져왔다. 굉장한 법문이었다. 사람들이 검투사를 따라 탁, 탁, 제 가슴을 치고 있었다. 다시 울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무엇인가에 조종당하듯이, 무의식중에 내 손 역시 가슴을 쳤다.

살아오는 동안 내 안에 쌓여온 어둠의 더깨도 알고 보면 모두 내 스스로 쌓아온 더깨일 터였다. 흰 드레스를 보고 관음보살의 현현이라 여긴 적이 왜 내겐 없었겠는가. 어둠을 어둠이라 여긴 것도 나였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것으로 옷을 지어 입은 것도 생각하면 나였을지 몰랐다. 나조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등 뒤에서 어떤 기척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도 아마 그에게 경배 드리는 마음으로 끝내 무릎 꿇고 앉아 뜨겁게 울었을 것이었다.

누가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고 느낀 건 바로 그때였다.
우악스런 힘이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키보다 높은 축대와 단식원 건물의 차가운 외벽 사이,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한 비좁은 틈새였다. 마른 풀들이 허리께에서 흔들렸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뒷덜미를 잡은 자의 다리가 가랑이 사이로 언뜻 보이는 듯했다. 느낌이 그랬다. 등 뒤는 캄캄했다. 사람인 것도 같고 짐승인 것도 같았다. 굶주린 멧돼지가 동사무소 앞까지 내려오는 바람에 난리가 난 것이 바로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파출소 순경이 쏜 공포탄 소리에 놀라 다시 산으로 도망친 멧돼지는 앞발을 들었을 때 어른 키보다 훨씬 컸다고 했다. 멧돼지일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멧돼지가 앞발을 들어 내 목덜미에 척 올려놓는 삽화가 환영으로 떠올랐다.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처럼 좁고 캄캄한 틈새까지 기척을 내지 않고 다가들었겠는가. 섬뜩했다.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검투사의 말소리가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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