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자녀교육 올인해 여윳돈 적고, 그나마 날릴까 투자 머뭇 … 은퇴 후 30년 어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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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한국 32%, 프랑스 21%, 독일 9%, 네덜란드 9%. 높아서 좋은 수치가 아니다. 직장인 중 ‘노후 준비가 전혀 없다’고 답한 사람의 비중이다. 피델리티자산운용이 한국과 유럽 각국을 조사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드러난 현실이다. 한국은 근로자들의 은퇴 후 소득 감소율도 가장 높은 것으로 별도의 조사에서 나타났다. 한국은 은퇴 후 소득이 은퇴 직전의 42%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은 58%, 영국은 50%, 일본은 47%였다. 준비가 없으니 퇴직 후 소득이 급감하는 것도 당연하다. 대체 한국 근로자들은 왜 은퇴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한국 직장인들이 노후준비에 소홀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집 장만하고 애들 가르치느라 여윳돈이 없다는 것, 둘째는 극히 보수적인 투자 성향, 셋째는 정부의 정책 미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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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사교육비는 말할 것도 없고 공교육비의 민간 부담률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부동산 가격도 소득 수준에 비해 몹시 높다. 이 때문에 가계자금이 대부분 부동산에 묶여있다. 한국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가계자산의 약 80%가 부동산이다. 반면 미국은 이 비중이 35%, 일본은 41%로 한국의 절반 안팎이었다.

 반대로 금융자산 비중은 한국이 20%, 미국은 65%, 일본은 59%다. 미국이나 일본은 노후 대비나 목돈 마련을 위한 목적으로 훨씬 많은 돈을 배분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은퇴 후 자금사정이 우리에 비해 더 넉넉하다.

 한국인들은 또 노후 대비 금융상품도 예금·적금처럼 안전한 것 위주로 운용한다. 피델리티자산운용이 한국과 유럽 각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인은 ‘낮은 위험, 낮은 수익률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89%였다. 유럽 각국은 70% 안팎이었다. 전체 가계자산에서 펀드·주식·채권 같은 금융투자상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한국은 5.8%로 미국(33.8%)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안전자산을 찾는 성향으론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일본인들도 금융투자상품 비중이 7.6%로 한국보다 높았다.

 이처럼 안전자산에만 쏠리다 보니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노후 대비 자금을 불리기가 쉽지 않다. 보험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개인이 매달 20만원씩 30년간 연금을 부어도 은퇴 후 받을 수 있는 돈은 퇴직 직전 소득의 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연금의 평균적인 투자 성향에 따라 투자했을 때 거두게 되는 수익이 이렇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안전자산에만 몰두하면 은퇴 후 여유를 갖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다. 보험연구원 류건식 선임연구위원은 “퇴직 후 자금은 안전이 중요하지만 수익률까지 고려해 적절히 투자 배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전자산만 쳐다보는 성향을 탓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어쩌다 한 번씩이라지만 펀드를 굴리는 자산운용사들이 사고를 쳐 개인투자자들의 신뢰를 잃기 때문이다. 당장 최근만 해도 와이즈에셋자산운용이 파생상품에 돈을 굴렸다 900억원의 손실을 냈다. 주식 시장 막판 외국인의 대량 매도로 주가지수가 뚝 떨어진 11월 11일 하루에 이만큼 손실을 입었다. 이 때문에 이 회사가 운용하는 펀드 가입자들이 총 1조원대에 이르는 펀드 환매 요구까지 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노후 생명줄인 은퇴 준비자금을 저런 데 맡겨 한 번에 털어먹을 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게 마련이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와이즈에셋의 경우와 같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의 건전성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 중이다.

 개인들의 노후 대비 투자자금을 수익성 높은 자산에 끌어들이기 위한 세금 혜택도 약하다. 현재 한국은 연금저축 가입자에 대해 연간 납입액 중 300만원까지 소득공제를 해준다. 금융투자협회와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등에 따르면 미국은 연간 1만6500달러(약 1900만원)까지 세금혜택을 주고 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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