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의 세상읽기]20세기의 마지막 추석…우리는 무엇을 수확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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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9월24일 추석은 20세기 마지막 명절이다. 노력에 대한 보답의 명절이니 어느 해의 추석인들 감회가 깊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번 추석은 더욱 더 감동적이다. 20세기의 마지막이란 시의성도 그러하지만 바로 1년 전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천양지차(天壤之差)
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추석(10월5일)
을 4일 앞두고 IMF는 9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7%로 추락한 데 이어 99년에도 -1%를 기록, 한국인의 IMF시련은 더욱 가혹해질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정부는 이런 무심한 IMF에 맞서 좀더 따뜻한 전망치를 주장했지만 그것도 2% 성장에 불과했다. 94~97년 4년간 평균 7.5% 성장에 길들여져 있던 한국인에게 99년은 썰렁하고 암울한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전설같은 얘기가 되고 말았다. 지난 2분기의 경제성장률은 9.8%. 웬만한 경제연구기관은 올해의 성장치가 9%대에 달할 것이란 전망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은 개도국에서나 있을 법한 깜짝 성장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수치뿐이 아니다. 가족이 모여 앉는 추석 테이블의 화제도 크게 바뀌었다. 1년 전 화제는 정치적으로는 세풍·북풍과 정치권 비리사정, 사회적으로는 노숙자들의 겨울나기 같은 것들이었다.

귀성길 신문에는 이기택 전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의 사진이 실렸다. 푹 꺼진 뺨,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과 턱수염, 허탈과 분노속에서 허공을 응시하는 눈…. 이씨는 “경성비리에 연루됐으니 출두하라”는 검찰소환에 항의해 10여일간 단식하고 있었으며 추석 며칠 전 병원으로 이송된 것이다. 70년대 DJ·YS와 함께 야당을 이끌었던 이기택씨는 야당 출신 동료들이 잡은 정권에서 정권과 싸우는 최초의 단식투쟁 인사가 된 것이다. 이씨의 단식은 특히 부산 지역의 추석 테이블에 많이 올려졌다.

1년이 지난 올해 추석 테이블의 정치 메뉴는 확 달라졌다. 세풍은 한바탕 일진광풍 끝에 사라졌고 북풍은 언제 그런 게 있었느냐듯 일찌감치 사그라들어 버렸다. 이씨를 단식하게 만든 사정도 옛날 얘기가 돼 있고 지금 사정바람에 움츠러들고 있는 국회의원은 없다.

그 대신 올 추석 테이블에는 신당과 당을 두 개나 후원하게 된 어느 여성기업가와 청문회의 네 여인과 내년 4월의 총선이 등장했다. 모든 게 그렇게 변했다. 한국서 1년을 산다는 것은 외국서 수년을 사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추석은 이렇게 1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다. 1년 전의 추석은 헐벗고 배고프고 우울하며, 여야가 생사를 걸고 싸우고, 사람들이 노숙하는 그런 것이었다.

올해의 추석은 그보다는 훨씬 화려하고 배부르고 기쁘며, 칼부림보다는 말싸움을 하고, 백화점·시장마다 선물을 고르려는 손길로 붐빈 그런 명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나아진 것일까. 1년간 제대로 자란 것을 제대로 수확한 것일까. 우리는 달라지고 있는 걸까. 이제 커다란 근심은 없는 것일까. 이대로 2000년을 맞으면 21세기의 첫 추석은 더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걸까. 지난 1년을 땀속에서 열심히 보낸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럴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착실하게 소득을 추수한 사람들, 커다란 사고없이 가족의 안녕을 지킬 수 있었던 이들에겐 이 20세기의 마지막 추석이 따뜻하고 뿌듯한 것일 게다. 그들에게 보름달은 희망과 만족의 달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보름달도 많다. 먼저 일확천금 허망의 달. 지난 1년엔 유난히 주풍(株風)
에 날아가버린 사람이 많았다. 재벌그룹의 오너와 증권사 사장은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바꾼 뒤 호재를 발표해 35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가 공모사기혐의로 사법처리됐다. 다른 사람 얘기를 할 것도 없이 주풍도사 이익치 회장이 다름아닌 주풍에 휩쓸려 감옥에 갈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난세에 영웅이 난다 하여 한때 그는 금융난세의 스타로 평가받았지만 지금 쓸쓸히 보름달을 쳐다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채풍(債風)
변고도 있었다. 중졸의 명동사채업자 출신인 세종증권의 K씨는 회사채를 불법으로 사고 팔아 5백여억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어디 이들뿐이었는가. 주가가 폭락했다 폭등하는 바람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축재(蓄財)
의 욕망을 좇다 지금 보름달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다음은 운명 역전의 달. 강경식·김인호씨는 지난해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는 절박함속에서 달을 쳐다봐야 했다. 양인은 지금 운명의 강인한 복원력에 감탄하며 달을 보고 있을 것이다. 달빛은 영어(囹圄)
의 몸이 된 임창열 경기지사의 좁은 방에도 어김없이 스며들 것이다. 지난해 추석 때 임지사는 달빛을 무색하게 만들며 영롱하게 빛나던 지방선거의 스타인 승리자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IMF의 행운아였던 셈이다. 두 그룹을 비추며 보름달은 말할 것이다. “약한 자들이여. 올라가는 운세에 겸손하고 내려가는 운세에 주눅들지 말라. 운명은 때론 셰익스피어보다도 극적이니 중심을 잡으라.” 서러움의 달빛도 있다. 3년 연속 물난리를 당해 집을 잃어도 그 터전을 떠날 수 없어 서러운 사람들, 공장문을 닫고 기계를 헐값에 팔아치워야 했는데 경기가 다시 살아나 비싼 값에 설비를 다시 사들여야 하는 서러운 사람들, 백화점은 인파로, 거리는 다시 차로 메워졌는데 아직도 실업의 대열에서 달을 쳐다봐야 하는 서러운 이들, IMF로 찢어진 후 여전히 명절 음식을 같이 나눌 수 없어 서러운 가족, 서러운 어린이들.

그러나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비수처럼 부모의 가슴을 파고 드는 씨랜드의 아픈 달빛이다. 뜨거운 불길을 견딜 수 없어 인형의 은실 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움켜 빼내며 엄마·아빠를 소리쳐 불러야 했던 아이들. 그들은 계수나무에서 놀고 있겠지만 부모는 차마 보름달을 쳐다볼 수가 없다. 송편을 먹을 수 없다. 나아졌다고 하면 나아진 것도 같고 변한 것이 없다고 하면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 지난해 추석 이후의 세월. 이렇고 저렇고 다툼이 있어도 많은 이들이 만감으로 쳐다보는 보름달은 온누리를 비추고 명절은 그렇게 지나간다.

비록 서양 명절이기는 하지만 석달 후 크리스마스를 맞으면 사람들은 또 만감속에서 20세기의 마지막 나날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새해가 밝고 시간이 지나면 한국인들은 21세기의 첫 추석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 보름달은 어떤 모습일까. 일확천금 허망의 달도 여전하고 운명 역전의 달도 여전할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도 잘하고 정권도 잘하고 사람들도 잘해서 서러운 달, 비수처럼 아픈 달빛만은 많이 줄었으면 좋겠다.

이코노미스트(http://economist.joongang.co.kr) 제5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