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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투기판된 선물·옵션 시장, 그냥 놔둬도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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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시장에서 가격 변동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소수의 투기(投機)세력에 좌우되는 급격한 변동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투기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투기는 가격변동을 이용해 이익을 남기는 행위로, 엄밀히 말해 시세조종과는 다르다. 하지만 투기세력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격을 변동시키려는 편향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투기의 해악을 문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올해 상반기 한국의 파생상품 거래량은 세계 1위로 전 세계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서울 증시의 시가총액(약 1조 달러)이 차지하는 2%와 대비된다. 파생상품 시장이 기형적으로 크다. 한국 파생상품 시장은 투자에 따른 손실 위험을 줄이려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지도 오래다. 돈 놓고 돈 먹는 투기장으로 변질됐다. 오죽하면 불법 사설(私設) 옵션사이트가 판치는 암시장까지 기승을 부리겠는가.

 국내 제도가 투기를 부추기는 측면도 적지 않다. 옵션 만기일 10분간의 동시호가를 통해 결제 기준이 결정되는 비합리적 방식부터 문제다. 선진국들처럼 사흘간의 가중평균으로 바꾸자는 지적에, 당국은 “외국인들이 불편해 한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또한 초단기 매매로 수익을 내는 ‘스캘핑’에 유리한 환경도 문제다. 이런 스캘핑이 세계 최대 옵션 거래량의 비밀이다. 올 들어 국내 옵션시장의 외국인 비중은 절반을 넘어섰다. 한국거래소는 이들에 의해 선물·옵션 가격이 급변동하고 거래량이 늘수록 더 많은 매매수수료를 챙기는 구조여서 팔짱을 끼고 있다.

 어제 금융위원회는 지난 11일 ‘옵션 쇼크’의 대책으로 사후증거금 제도를 손질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사모(私募)펀드가 무리한 투자를 하다 결제에 차질을 빚은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일반 투자자 보호책이나 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한 대책은 찾기 힘들다. “현물 시장의 덩치를 키우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주장만 반복할 뿐이다.

 우리 파생상품 시장은 세계 헤지펀드들의 놀이터가 돼 버렸다. 이들은 세계 최고의 수학 박사들을 동원해 무위험 차익(差益)을 노리는 프로그램 매매를 시도하고 있다. 앞으로 파생상품이란 ‘꼬리’가 ‘몸통’인 현물시장을 뒤흔드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대형 사고 가능성도 언제나 잠복해 있다. 1997년 이후 159차례의 선물옵션 동시 만기일 가운데 44번이나 장 막판에 코스피 지수가 2% 이상 급등락하는 홍역을 앓았다.

 이제 파생상품 시장의 양(量)보다 질(質)에 치중해야 할 때다. 결제기준을 옵션만기일 10분간의 동시호가를 통해 결정하는 방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선물·옵션 등 장내 파생상품에는 거래세를 물리고, 키코(KIKO)와 신용디폴트스와프(CDS) 같은 장외 파생상품에는 사전 심의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금융산업 발전에 파생상품의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우리 시장의 제동장치는 너무 허술하고 국제 핫머니의 농간은 너무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