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505호실 여자 5

창밖으로 귀를 열면 가랑잎들이 비탈길을 쓸고 가는 소리가 먼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오랫동안 노숙자로 떠돌던 남해 쪽빛 바다가 때로 그리워지기도 했다. 바다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도시로 올라오게 될까 봐 두려워서 떠돌던 세월이었다. 죽을 때까지 결단코 오지 않으리라고 골백번은 맹세한 도시가 여기였다.

감옥에서 4년, 부산에서, 마산 진해, 사천, 광양, 여수에서, 또 목포의 바다 끝에서 비렁뱅이 노숙자로 흘러 다닌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다. 겨울바닷가는 찾아오는 사람조차 드물었다. 이틀이나 사흘을 완전히 굶은 적도 있었다. 굶고 누워 있을 때조차 겨울바다는 저 혼자 끝없이 깊어졌다. 백사장 모래 속에 몸을 파묻고 칼바람을 견딘 날도 부지기수였다. 죽음 직전으로 몰린 적도 있었다.

잠이 들면 한 소녀를 찾아 헤맸다.
볼이 붉고 이마가 하얀 소녀였다. 처음엔 분명했던 얼굴이 시간 따라 조금씩 지워지는 슬픈 경험도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아주 옛날에 볼 붉은 소녀가 있었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감옥에서 나올 때쯤 소녀의 턱과 입술이 지워졌고, 떠돌이로 10년쯤 지나자 콧날과 눈과 귀도 완전히 지워졌다. 소녀가 그리우면 피가 밸 때까지 손바닥으로 바위나 벽돌담장이나 철판 따위를 두들겼다.

아무리 두들겨도 소녀의 얼굴은 완성되지 않았다. 손바닥에선 자주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흘렀다. 심지어 이름까지 생각나지 않게 되었다. 끓는 물에 손을 넣은 일까지 있었다. 소용없었다. 그래서 나는 꿈속에서도 소녀…… 라고, 이름 모르는 소녀…… 라고만 불러야 했다. 오랜 노숙자 생활에 그만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형태 없는 붉은 볼과 박속같이 하얀 이마와 짙은 눈썹 끝의, 팥알만 한 보랏빛 점 하나였다. 내 안에서 오래 묵어 소녀는 마침내 전설이 되고 만 것이었다. ‘아주 옛날에 보랏빛 점을 가진 소녀가 하나 있었다.’라고 나는 동화책을 읽듯이 자주 소리 내어 말했다.

‘샹그리라’는 천국이었다.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오래 자고,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았다. 잠자는 게 지겨우면 모자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관음동 일대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슈퍼마켓에 가면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202호 슈퍼마켓 젊은 남자가 다른 사람 몰래 밑반찬이나 군것질거리를 슬쩍 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다. 206호 여자에게서 견본용 화장품도 잔뜩 얻었다. 화상으로 우둘투둘해진 얼굴 반면에까지 밀크로션을 발랐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침저녁으로는 매일 비탈길과 잔디밭을 쓸었다.
낙엽은 잔디밭 끝에 있는 드럼통에서 조금씩 태웠다. 낙엽 타는 냄새가 참 고소했다. 정말 평화스런 나날이었다. 쪽문을 열고 나가면 관음봉으로 올라가는 길 없는 길이 나왔다. 군부대의 철조망을 피하려고 멀찍이 우회해 관음봉을 올라갔다. 멀리서 특수부대 훈련원들의 함성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길도 없는 데다가 경사가 워낙 급하고 바위가 많아 걷기 힘들었지만 스무 살 시절 산악인을 꿈꾼 적도 있는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관음봉 정상에 당도하면 도심지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여 좋았다. 새벽에 기차를 내렸던 정거장도 바라보였다. 서울에서 가까워서일까, 짧은 시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도시였다. 스카이라인을 이룬 도심지 너머로 번져간 시가지의 끝이 아스라했다.
가을은 그러는 동안 빠르고 장엄하게 침몰했다.

내가 그 여자, 505호의 여자를 처음으로 본 것은 막 겨울이 시작될 무렵, 관음봉 정수리에서 먼 데로 떠나는 기차의 실루엣을 보고 내려올 때였다. 샹그리라 남쪽을 꽉 막아선 암벽의 리지(Ridge)를 타고 내려오는데 잔디밭 파라솔 밑에 누가 앉아 있는 게 시선에 잡혔다. 나는 암벽 모서리를 붙잡은 아슬아슬한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검투사’라면, 날렵하게 바위 타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유랑으로 피폐해진 내 몸은 날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 암벽만 해도 경사가 거의 70도였다. 보통사람이라면 자일 없이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암벽이었다. 머지않아 암벽등반을 하던 스무 살 시절의 내 몸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멈춘 채 미간을 모았다.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건 검투사가 아니라 여자인 것 같았다. 질끈 묶은 긴 머리가 손에 닿을 듯 내려다보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