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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체면 구기고 후진타오 힘 과시하고 메르켈 제 발등 찍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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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호 04면

정상회의에선 모두가 승자다. 아니 승자로 연출된다. 적어도 선언문을 보면 그렇다. 토씨 하나하나까지 다듬어 내놓은 선언문에 어느 나라 대표가 패자로 비칠 수 있는 자구는 원천봉쇄된다. 셈이 빠른 미국 월가에서 정상회의 선언문이나 합의문이 묘비석(Tombstone)으로 불리는 이유다. 묘비석엔 망자에 대한 좋은 말이 가득하다. 선언문도 마찬가지다. 이번 세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선언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 G20 정상회의 미중독 정상의 손익계산서

미국 언론 “오바마의 판정패”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손익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G20 서울 정상회의 ‘단기 손익계산서’도 거의 만들어졌다. 우선 버락 오바마(49) 미국 대통령은 “판정패했다”는 게 미국 언론들의 평가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오바마 대통령이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12일 평가했다. 미국이 경상수지를 국내총생산(GDP)의 ±4% 이내에서 억제하자는 안(경상수지 목표제)을 밀어붙였으나 실패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경상수지 목표제는 환율전쟁의 근원인 세계 경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서울 정상회의 최대 이슈였다. 환율 관련 합의가 선언적인 의미를 뛰어넘어 실효성이 있을지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미국은 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경상수지 목표제를 안건으로 내놓았으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미국은 포기하지 않고 서울 정상회의까지 두 주 동안 물밑 협의를 벌였다. 심지어 정상회의 전날엔 밤샘 협상까지 감행했으나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다.

중국뿐 아니라 독일과 일본도 경상수지 목표제를 반대했다. 일본과 독일은 국제회의에서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던 나라들이다. 1985년엔 미국 쪽 요구를 사실상 100% 받아들여 ‘플라자합의’에 서명했다. 실제로 두 나라가 합의대로 했는지는 논란거리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는 합의문 작성 때 미국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지 못했다. 이런 두 나라가 올해 미국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은 중국의 반대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해석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완패한 것은 아니다. 중국을 겨냥해 ‘환율 유연성 확대’ 등 선언문 곳곳에 자국의 뜻을 스며들게 했다. G20 틀을 통해 중국의 환율시장 개입을 비판할 수 있는 틀을 확보했다. 빠르게 떠올라 버거워진 중국을 미국이 좀 더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후진타오, 글로벌 리더 모습 부족
오바마의 대척점에는 후진타오(胡錦濤·68) 중국 국가주석이 있다. 그가 판정승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후진타오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선언문에 경상수지 균형을 촉진한다’는 구절이 선언문에 들어가도록 했다. 지난달 경주회의에서는 시장결정적 환율제도로 이행한다는 데도 동의했다. 이제는 중국이 드러내놓고 외환시장에 개입하기가 껄끄러워진 셈이다. G20 서울 합의문이 선언적이기는 하지만 중국이 어겼을 땐 비판의 근거가 된다.

대신 후진타오는 실리를 챙겼다. 국제통화기금(IMF) 지분을 크게 늘렸다. 지분율 순위가 6위에서 3위로 올라섰다. 경제 규모에 걸맞은 위상을 인정받았다. 영국 가디언지는 “후진타오가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나라들에 의지할 곳이 돼줬다”고 12일 보도했다. 그동안 미국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나라들이 중국의 후진타오를 믿고 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든든한 배후자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후진타오가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둔 것은 아니다.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위상을 높이는 수확을 거두기는 했지만 차세대 글로벌 리더다움은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이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는 4원칙이란 것을 내놓기는 했다. ▶나라별로 다른 경제 사정을 고려해 ‘독자적인 발전의 길과 정책’을 존중하고 ▶모든 형태의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하며 ▶국제 금융기구를 개혁하고 ▶선진국·개도국 간 격차 축소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후진타오 4원칙이 현재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하는 바에 가깝다. 공동의 비전을 담은 경제 패러다임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20세기 외환시장 최고 이론가인 루디거 돈부시 전 MIT 교수가 말한 ‘금융통화 프레임(Frame)’을 후진타오가 ‘아직’ 제시하지 못한 셈이다.

FT “메르켈 고집, 유로화에 위협”
앙겔라 메르켈(56) 독일 총리는 사실상 유로사용권(유로존) 16개국 대표로 G20 서울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도 참석했지만 유럽 재정위기 국면에서 그리스 구제작전을 사실상 지휘한 메르켈이 더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메르켈은 뚝심을 자랑했다. 미국이 강하게 요구한 경상수지 목표제를 거부했다. 일본이나 중국 대표들이 미국 요구에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동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도 그는 반대를 고수했다. 근거는 너무나 간명했다. 경상수지는 ‘경쟁력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경상수지 흑자나 적자를 구체적인 숫자로 제한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유용하지 않고 금융·재정 측면에서도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GDP 기준 6.1%였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자원 수출국을 제외하곤 가장 높다. 독일은 뛰어난 제조업 경쟁력과 저평가된 유로화에 힘입어 수출을 늘렸다. 그 결과 경상수지 흑자를 만끽하고 일자리를 유지해 왔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메르켈의 고집이 유로화 안정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로화를 뒤흔들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의 근본 원인은 유로존 내부의 불균형이다. 독일 등이 지나치게 경상수지 흑자를 누리는 반면 그리스 등은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그 결과가 재정위기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메르켈의 경상수지 목표제 거부는 곧 유로존 내 불균형 해소 거부나 마찬가지다. 이는 독일이 가장 큰 혜택을 누리고 있는 유로화 체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

요즘 아일랜드 재정위기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 나라 채권값이 뚝 떨어지는 등 금융시장이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등이 다시 구제금융을 투입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미국 중앙은행처럼 양적완화를 다시 해야 한다. 유럽발 통화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영국 쪽 전문가들은 “메르켈이 경상수지 흑자로 벌어들인 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 유로화 체제를 지키려 한다”고 촌평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G20 서울회의 손익계산은 달라질 수 있다. 85년 플라자합의 직후 미국의 무
역적자가 당장 해결될 듯 보였다. 그때 미국이 가장 큰 파이를 차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뒤에 다시 재평가해 보니 미국의 무역적자는 개선되지 않았다. 이런 장단기 평가 차이는 다자간 협상 당사자들이 피하기 힘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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