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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왕자를 팔아넘긴 국경인과 그를 진압한 정문부 (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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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정문부 장군의 초상. 장군의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다. 1588년(선조 21)생원이 되고 문과에 급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 등이 반란을 일으켜 임해군 등을 일본군에 넘겨주자 의병대장이 되어 반역자들을 죽이고, 이어 길주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격파하는 북관대첩을 거두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겪은 이후 많은 한국인은 ‘매국노’ 하면 이완용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매국노’의 상징처럼 지목되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국경인(鞠景仁)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행적을 보였던 인물일까.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빠르게 북상해 오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4월 29일 파천하기 직전, 선조는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5남 순화군(順和君)에게 함경도로 가라고 지시했다. 태조 이성계 선조들의 근거지이자 왕업의 발상지였던 함경도로 왕자들을 보냄으로써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규합해 전란을 극복하는 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조처였다.

 그런데 두 왕자는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는커녕 7월 23일 회령(會寧)에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포로가 되는 과정이 충격적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일본군에 직접 붙잡힌 것이 아니라 당시 회령에 귀양 와 있던 전주 출신의 아전 국경인에게 포박돼 가토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국경인은 반란을 일으킨 뒤 회령의 객사(客舍)를 습격해 두 왕자 부부와 그들의 외척들, 수행했던 신료들을 모두 결박해 가토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왜 이렇게 엄청난 반역 행위를 저질렀을까. 『조야첨재(朝野僉載)』를 비롯한 사료들은 두 가지 입장에서 그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평소 간악했던 데다 전주에서 회령까지 유배된 것에 원한을 품었기 때문”이라며 국경인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가토가 이끄는 일본군이 함경도로 진입하자 주민 대다수가 반란을 꾀하게 되었다”고 해 지역의 분위기가 이미 반정부적으로 돌아선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어느 분석이 맞든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의 위정자들은 함경도를 비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교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차하면 반기를 들지도 모르는 위험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다.

 하지만 『선조수정실록』 『용사일록(龍蛇日錄)』 『재조번방지(再朝藩邦志)』 등에는 국경인의 ‘반역’ 동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들어가 회령에 머물며 사나운 노복들을 풀어 백성들을 침학하고 수령들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거나 “순화군의 장인 황정욱(黃廷彧)이 궁노(宮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침탈하고 소란을 피워 인심을 잃고 반란을 재촉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계속>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