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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연재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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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0jean76@hanmail.net

505호실 여자 1

남자는 ‘샹그리라’ 건물의 소유주였다.
그는 샹그리라의 꼭대기 층에서 가족 없이 혼자 살았다. 샹그리라엔 ‘원룸’이 14개 들어 있었다. 주차장은 동쪽 정면에서 볼 때는 일층이지만 서쪽 마당에서 보면 지하였다. 경사를 기능적으로 살려 지은 건물이었다. 주차장 바로 위층을 2층이라 불렀다. 2층은 201호부터 202, 203, 205, 206, 207호까지, 복도를 중심으로 방이 6개 배치되어 있었다. 3층 다음을 4층이 아니라 5층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204호는 없었다. 침대 책상 냉장고 에어컨이 다 갖춰진 풀옵션 방식이었다. 3층, 5층은 방이 4개씩이었다. 원룸이라고 불렀으나 실평수가 20여 평이나 되며, 구조도 침실과 거실이 분리돼 있어 실제적으론 투룸이나 다름없었다.

입주자들은 남자를 가리켜 ‘이사장님’ 혹은 ‘검투사’라고 불렀다.
무슨 이사장(理事長)이냐고 묻자, 202호 젊은 남자는 “산 속 어디엔가 뭘 가지고 있다든가, 저도 확실한 것은 잘 모르는데요. 암튼 다들 그렇게 불러요.”라고 말했다. 어떤 재단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202호 젊은 남자는 근처에 있는 대형 슈퍼마켓에 근무하고 있었다. 검투사는 그가 새벽마다 진검을 들고 나와 수련하니까 자연스럽게 붙여진 별명일 터였다. 한때 검도 선수였다는 말이 떠돌았으나 그 역시 소문일 뿐이라고 했다.

건물이 지어진 것은 대략 15년 전이었다.
예전부터 관음봉 일대는 국유지로서 군의 특수부대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운악산이 도시의 동북 방향을 휘감아 내려오다가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위에 사격장과 유격훈련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격장은 옮겨갔으나 유격훈련장은 아직 그대로 있다고 했다. 따라서 관음봉의 동쪽 편 일대는 아직도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군(軍)에서 관리하던 땅을 대지로 바꾸어 이만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이사장님’이 군과 깊은 유대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특수부대의 고위장교 출신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또한 확인되지 않은 정보였다. 곽 사장의 일상은 은둔자처럼 오리무중이었다. 외출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수련을 하는 새벽 시간 외에 마당으로 내려오는 법도 없었다.

“배짱 있어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처음 만나던 날 새벽, 그는 클클 웃다 말고 말했다.
배짱이 좋은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나는 참았다. “아이고, 저 같은 것이 무, 무슨 배짱…….” 짐짓 말을 더듬는 체 내가 머리 조아리며 대답했고, 그가 또 풋 하고 웃었다. “내숭 떨 거 없네. 내 칼을 정면으로 받고도 놀라지 않은 사람, 임자가 첨이네.” 문 밖에서 칼을 겨눴으면서도 창고 안의 나를 다 들여다보았다는 투였다. 그는 일종의 투시안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201호가 비어 있으이.”
잔디밭을 떠나기 직전 한 말은 그것이었다.
기습적으로 던진 말이었으므로 그 방을 사용하라는 것인지 어쩐지 요령부득이었으나, 반문하지는 않았다. 그가 당신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문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나는 벌써 알아차리고 있었다. 201호가 비어 있다고 하기 전에 그가 내게 건넨 말도 겨우 “행색으로 보아 갈 데가 없는 사람인 거 대뜸 알아보았지. 월급은 방을 무상으로 주고…… 백일세.”였다. 건물관리인으로 내가 채용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담대하면서 쿨쿨한 성격이었다. 나의 전력에 대해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나의 의견을 묻지도 않았다.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머물게 된 방에서 늙수그레한 홀아비 관리인이 살고 있었다는 말은 나중에 들었다. 관리인으로서 내가 할 일은 변기나 보일러 등이 고장 났을 때 사람을 불러 수리하도록 하는 일과, 월세가 입금되지 않은 방주인을 만나 약속 날짜가 지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과, 이사를 가거나 새 사람이 들어올 때 살피는 일과, 일괄해 현관에 놓고 가는 우편물들을 방마다 배달해주는 일 등이 포함됐다.
“제 얼굴, 괜찮으시겠습니까?”
“클클, 나는 그게 오히려 맘에 드네.”
그의 뒤꼭지에 대고 내가 물었고, 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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