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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담을 허문 예수,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몸소 보여줬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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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배 교수는 “예수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단시했다. 말도 섞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런 장벽을 허물었다. 더불어 사는 것. 그게 예수의 정신, 예수의 메시지다. 그걸 왜곡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오종택 기자]

이집트를 탈출해 40년간 광야를 떠돌던 유대인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갔다. 그곳에는 여리고 성이 있었다.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그들은 성 주위를 일곱 바퀴 돌면서 함성을 지르며 기도했다. 그랬더니 여리고 성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고 구약성서에는 기록돼 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일부 개신교인이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 가서 그 흉내를 냈다. 비난의 화살은 오히려 그들에게 쏟아졌다. “너무나 배타적이다” “타 종교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부족하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를 깊이 아는 이들은 달리 말한다. “그건 타 종교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자신의 종교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거다.” 그들이 간과했던 예수의 가르침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1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대를 찾았다. 거기서 이정배(55) 교수를 만났다. 그는 기독자교수협의회장과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산하 종교간대화협의회장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교수불자연합회(회장 최용춘 상지대교수)와 공동으로 감신대 웨슬리홀에서 개최하는 ‘2010년 이웃종교간의 대화마당’ 학술세미나(5일 오후)를 준비 중이었다. 그에게 개신교인의 ‘땅 밟기’식 배타적 시선의 뿌리에 대해서 물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열정이 넘친다. 그런 열정이 때론 사회적 반감을 불러온다. 왜 그런가.

 “종교의 발생지는 문명의 발생지다. 먼저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풍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럼 해당 종교의 특성도 간파할 수 있다.”

 -풍토라니, 예를 들면.

 “4대 문명의 발생지인 인도는 몬순형 기후다. 자연이 주는 혜택도 엄청나고, 자연이 주는 폐해도 엄청나다. 쓰나미 등이 한번 쓸어가면 남는 게 없다. 그 앞에서 인간은 모든 걸 수용하게 된다. 그런 수용의 종교가 힌두교와 불교다. 자연 결정론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기후와 풍토의 영향은 크다.”

 -그럼 그리스도교는 어떤가.

 “히브리 문명은 사막 풍토다. 사막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땅이다. 자연이 주는 혜택이 없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의지적 인간이어야 한다. 개인의 의지가 아닌 집단적 의지여야 한다. 그래서 집단 의지가 자연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신적인 표상을 가졌던 거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의지적인 종교다.”

 -예수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나와 상대를 둘로 가르지 않았다. 타종교인을 포용했지, 적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 당시 유대교 율법의 첫째가 ‘안식일을 지켜라’였다. 예수님은 그걸 깼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율법도 깼다. 그렇게 예수는 ‘사람을 위한 종교’를 설했다. 바울의 서신에도 ‘그리스도는 모든 막힌 담을 허무는 분이다’란 대목이 있다.”

 -그렇게 화해하고, 소통하고, 생명을 전하는 것이 예수의 메시지가 아닌가.

 “맞다. 지난 여름, 중동에 갔더니 아랍 지역에서 생존한 기독교가 있더라. 그게 바로 콥틱 기독교, 시리아 기독교다. 중동에서 아랍 문명과 끊임없이 사귀면서 생존한 기독교다. 그들이 한국 교회의 일방적 선교 방식을 염려하더라. 오랜 세월 그곳에 적응한 자신들을 무시하고, 왜 서구식의 제국주의 기독교를 가지고 와서 선교를 하느냐고 묻더라. 한국의 개신교는 의지가 너무 강하다.”

 -그게 누구의 의지인가. 나의 의지인가, 신의 의지인가.

 “예수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뜻이 뭔가. 모든 분리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는 아버지의 뜻을 지나칠 만큼 내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동안 그게 장점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공헌할 여지는 작다. 한국 개신교는 정체성이 너무 강하다. 정체성이 너무 강하면 사람 잡는 정체성이 된다. 그건 왜곡된 정체성이다.”

 -‘사랑’이란 예수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왜 그게 왜곡되기 시작했나.

 “노자의 『도덕경』에 거짓 위(僞)자가 있다. 그게 무위(無爲·인간의 욕심을 뺀 자연의 상태)가 되려면 사람 인(人)변을 떼면 된다. 개신교도 그렇다. 이젠 사람 인자를 떼어버려야 한다. 그게 거짓을 벗는 거다. 사람 인(人)자를 고집하며 내 뜻대로 하려고 해선 안 된다.”

 -사람 인(人)자를 떼려면 어찌해야 하나.

 “기도에는 4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보케이션(invocation), 즉 구하는 기도다. 가령 ‘내 아들을 대학에 붙여달라’는 식의 기도다. 대부분 기독교인이 하나님 뜻을 빌어서 자기 뜻을 관철하는 이 단계에서 끝나고 만다.”

 -그 다음 단계는 뭔가.

 “둘째는 메디테이션(meditation·명상)이다. 먼저 입을 닫아야 한다. 하루에 향 하나가 탈 시간(20분) 동안 침묵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그럼 자기 소리를 멈추고, 자기 주장을 멈추게 된다. 셋째가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 즉 관상(觀想)이다. 자기 소리를 그칠 뿐만 아니라 남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 우리가 인보케이션(구하는 기도)을 할 때는 자기 소리만 들을 뿐, 결코 남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마지막 단계가 유니언(union·일치)이다. 하나님 뜻과 내 뜻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단계다. 그게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결국 내 뜻이 무너질 때 하나님 뜻이 사는 건가.

 “그렇다. 인보케이션에만 머물면 자기 뜻의 관철, 자기 교회의 확장, 기독교 우월주의를 좇기 쉽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기도는 붓글씨와 같다.”

 -붓글씨라니.

 “붓글씨를 배우려면 10년, 20년이 걸린다. 붓으로 글씨만 쓴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붓으로 선을 긋는 것만 가르쳐주고 다 알려줬다고 하면 곤란하다. 그런 기독교는 의지만 키우고, 에고(ego)만 키우게 된다.”

 최근 이 교수는 강의를 들은 신학교 1학년생들에게 과제를 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숨진 고(故)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고 감상문을 내라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나왔다’ ‘너무 감동적이었다’는 얘기가 많더라. 그런데 학생들은 마지막에 꼭 한 줄을 덧붙였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도 구원이 있나요?’라고 말이다. 각자 다녔던 교회에서 지금껏 그런 식의 신앙을 배운 게 아닌가 우려가 된다. 그게 한국 개신교가 가진 자화상의 슬픈 한 단면이다.”

 이 교수는 “종교 간에는 상대 종교를 파괴하는 싸움이 아니라 ‘선한 싸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이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누가 자기 종교를 창시한 이의 정신을 온전히 육화(肉化)시켜 낼 것인가로 경쟁해야 한다. 그런 이가 기독교에 많다면 사람들은 기독교에 호응할 거다. 저절로 기독교의 물을 마시고 싶어할 거다. 그게 진정한 종교간 경쟁이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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