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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원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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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산을 만나 운명이 바뀐 사람이 많다. 여성 산악인 남난희씨가 그랬다. 산을 향한 짝사랑의 신열로 들떠 겨울 백두대간을 혼자 종주했고, 히말라야 강가푸르나를 여성 최초로 올랐다. 오로지 오르는 것만이 목적인 산타기였다. 서구의 알피니즘이 추구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에 매달린 그는 허망했다. 오르고 올라도 목마른 열망 덩어리가 울컥거렸다.

요새 남씨는 지리산 자락에서 산다. 편안한 산을 만나니 오르지 않고 그냥 바라만 봐도 좋다고 한다.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며 그는 말했다. "그동안의 산이 등산(登山)이었다면, 이때부터의 산은 입산(入山)이 되었다."

등산과 입산을 가르는 잣대는 산을 바라보는 눈이다. 서구에서는 산을 높이로 매긴다. 높은 산이 장한 산이다. 그래서 누가 더 높은 산에 빨리 올라갔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깊이를 친다. 깊은 산일수록 좋은 산이다. 깊어야 사람이 들 만하다. 산의 깊이란 결국 인생의 깊이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에 내가 있기'에 산에 든다. 깊은 산에 들수록 제 몸을 겨누는 눈이 무거워진다.

지난해 5월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다 숨진 산악인 백준호.박무택.장민의 시신을 거두러 '휴먼 원정대'가 80일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엄홍길씨가 대장이다. 한국 등반사에서 해외 원정 신화에 앞장서 온 그가 차가운 산속에 남은 후배의 주검을 찾아 다시 떠났다. 더 어렵고, 더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 산에 혼을 묻은 산악인의 용기와 사랑은 휴머니즘의 한 결정이다.

이제는 기록 경신에 매달리던 등정주의의 시대를 보낼 때가 됐다. 등정주의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앓아 온 속도주의와 물량주의와 집단주의의 반영이라는 것이 산악인 자신의 분석이다. 풍부한 물자와 완벽한 안전망과 안이한 등산로 선택으로 정상에 오른 산꾼은 진짜 알피니스트가 아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모험과 도전의 등산 정신이다.

한치 앞에 뭐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고 미지의 세계를 헤쳐가다 쓰러진 세 사람을 생각한다. '휴먼 원정대'가 그 이름답게 입산한 산악인의 휴머니즘을 찾아 내려오기를 빈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