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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역차별 발 묶인 국내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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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내 자본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지난 11일 금감위 윤증현 위원장이 "유망기업을 매각할 때는 국내 산업자본이 차별없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면서 부터다. 윤 위원장의 이 같은 언급은 국내 기업인수.합병(M&A) 시장에서 외국기업들은 자유롭게 기업사냥에 나서는 것과는 달리 기업인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는 국내기업에 활로를 열 지 주목된다.

편집자

두산중공업의 대우종합기계 인수는 아직 진행형이다. 인수 절차는 대부분 끝났지만 공정거래위원회의 최종 판단이 남아있다. 공정위가 두산중공업을 대우종기와 같은 기계업종으로 판정하지 않으면 두산중공업의 대우종기 인수는 무산된다. 공정거래법상 두산중공업이 현재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는 여력은 4000억원 내외에 불과하다. 순자산의 25%까지만 다른 회사에 출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우종기의 인수가는 이보다 훨씬 많은 1조8000억원이나 되기 때문에 대우종기를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같은 업종의 기업을 인수할 경우엔 출자규제를 받지 않는다.

이처럼 출자규제는 국내 기업의 운신폭을 좁게한다. 반면 외국기업들은 이 덫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역차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칫하다간 국내의 알짜배기 기업을 무더기로 외국기업에 넘겨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미 국내 은행산업은 외국 자본의 독무대가 된 지 오래다. 국내 산업자본은 금융자본과는 분리해야한다는 규제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양금승 기업정책팀장은 "유망기업들을 외국자본에 몽땅 넘겨주는 우를 범하기 전에 역차별적 규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자규제는 M&A 걸림돌=지난해 말 공정거래법이 개정됐으나 출자규제는 그대로 유지됐다.그러자 재계는 낙담했다. 두산.현대.CJ.금호아시아나 등 상당수 중견그룹들의 실망감은 더 컸다. 대부분 출자한도를 채웠거나 한도에 다다른 기업이다. 가령 금호는 지난해 범양상선을 인수하려했지만 출자규제 때문에 입찰 신청도 못했다.

두산은 대우종기 인수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지만 얼마전 뛰어든 진로 인수전에서도 출자규제의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 출자규제 대상 기업집단 규모기준이 최근 6조원으로 상향조정되면서 간신히 출자규제를 받지 않게 된 CJ도 한때 진로 인수전에 뛰어들지 못할까 걱정했었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과 현대엘레베이터등 거의 모든 계열사가 출자한도를 넘어 기업 인수와 신규 사업 진출은 아예 엄두를 못내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선 현대건설.대우건설.쌍용건설.하이닉스.대우인터내셔널 등 M&A 시장에 매물로 나와있는 우량기업들이 대부분 외자에 넘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현대차.LG.SK 등 인수 여력이 있는 4대 그룹은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인수에 나서기가 힘들고 나머지 중견그룹들은 대부분 출자규제에 묶여 인수전에 뛰어 들기 쉽지 않아서다. 재계 관계자는 "매물로 나온 기업 대부분은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려낸 기업"이라며"자칫 죽 쑤어 외자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출자규제는 역차별적이다. 1년여전 외국인투자자인 소버린의 공격을 받은 SK㈜는 외국인투자기업으로 인정받아 간신히 경영권 위협에서 벗어났다.

당시 SK그룹의 SK㈜ 지분율은 35% 남짓이었지만 출자규제로 실제 의결권은 10%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SK관계자는 "공정위가 SK㈜를 외국인투자기업으로 인정해 그룹 의결권을 되살려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수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은행은 이미 외자의 독무대=제일.한미.외환은행은 소유권이 외자에 넘어가 있고, 국민.하나.신한은행도 외국인 지분율이 훨씬 더 높다. 사실상 국내자본이 지배하는 곳은 우리은행뿐이다. '산업자본의 은행소유 금지'때문이다. 전경련 양 팀장은 "덩치큰 은행을 인수할 곳은 현실적으로 대규모 산업자본밖에 없다"면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규제가 사라지지 않는한 은행은 모두 외자의 손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정부도 고민이다. 외자가 지배하는 은행들이 상업성 위주 경영과 단기수익경영에 치우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우리은행 등 1~2개 은행은 국내자본이 지배하도록 한다는게 정부 인식"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금감위가 '역차별'을 제기한 것은 '은행을 몽땅 넘겨줄 수 없지 않느냐'는 차원으로 보고 있다. 명지대 조동근 교수는 "은행은 상업성과 공공성이 조화돼야 하지만 외자 은행에게 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면서 "기업금융, 특히 중소기업 대출비율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외자의 은행지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혔다.

반면 외자의 은행지배는 역차별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참여연대측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 상한선(4%)은 외국 산업자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또 참여연대 김상조 경제개혁센터 소장은 "외국계 투자펀드의 국내은행 지배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재벌의 은행지배가 대안이 돼선 안된다"라며 "오히려 더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한다.

◆다른 역차별도 많다=외환위기 이후 외자유치 바람이 불면서 국내 기업이 상대적으로 '찬밥'대우를 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외국의 유명 기업을 끌어당기기 위해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법인.소득세등 각종 세금도 대폭 감면해주고 있다. 반면 같은 업종의 한국 기업들은 각종 규제에 묶여 공장 증설 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국내 대기업은 중소기업 고유업종에 진입할 수 없지만 외국 대기업은 아무런 제약이 없다. 전경련측은 "유통시장이 개방되면서 대형 할인매장들이 외국 대기업이 생산한 제품(중소기업 고유업종으로 지정된 품목)을 직수입하고 있다"면서 "고유업종 규제는 이미 실효가 없는 제도가 됐다"고 지적한다. 또 국내기업들은 돈을 굴리거나 사람을 쓰는데도 외국기업에 비해 불리하다. 국내기업은 순익 총액의 절반 이상을 이익배당할 수 없지만 외자기업은 전액을 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외자기업은 국내기업과 달리 국가 유공자를 전체 고용인원의 3~8% 범위에서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부담도 없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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