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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3연임, CEO 4연임 … 금융계 ‘상고 출신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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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0월 30일 서울 태평로 신한은행 본점 로비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사회를 마치고 나온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으로부터 한마디라도 들으려는 취재진과 경호원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라 전 회장은 얼굴을 찡그린 채 “(직원들에게) 앞으로 따로 얘기할 기회를 가질 것”이란 말을 남기고 간신히 차에 올라탔다.

 라 전 회장은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1시간 넘게 자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지난 8월 17일 미소금융 망우지점 개소식에 참석해 우림시장을 돌아봤을 때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마포에서 혼자 자취하면서 시장음식을 많이 먹었죠.”

 시장 순댓국집에서 그는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홀로 상경해 선린상고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렸다. 고교 졸업 뒤 그는 1959년 농업은행에 입행했다. 이후 대구은행 시절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의 눈에 들어 제일투자금융으로 옮겼고, 82년 신한은행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점포 3개짜리 꼬마은행이던 신한은행을 키우기 위해 그는 현장으로 뛰어다녔다.

 “초창기엔 시장바닥 많이 쫓아다녔죠. 직원들이 동전 바꿔주는 기계를 카트에 싣고 다녔어요. 그렇게 해서 고객들에게 은행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시장을 찾아다니는 건 일수꾼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다른 은행들로부터 ‘은행원 지위를 땅에 떨어뜨렸다’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라 전 회장은 “그때 현장을 누빈 직원들은 은행에 대한 애정이 강했는데, 그 뒤엔 많이 시들었다”며 당시의 신한 문화를 높게 평가했다.

 91년 신한은행장에 선임된 그는 행장을 3연임하며 ‘상고 출신 행장 신화’를 열었다. 99년 2월엔 잠시 현직에서 물러나 은행 부회장을 맡았지만, 2001년 신한금융지주 창립과 함께 대표이사 회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후 인수합병(M&A) 불패의 기록을 남겼다. 굿모닝증권을 시작으로 100년 역사의 조흥은행과 업계 1위 LG카드 등 대형 M&A를 잇따라 성공시켰다. 조흥과의 M&A로 신한은행은 단숨에 선두권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올해 초 그가 4연임을 하며 금융권 최장수 CEO 기록을 세우면서부터 잡음이 나왔다. 퇴진이 점쳐졌던 그가 연임한 데 대해 말이 많았다.

 이에 대해 당시 그는 “내가 욕심이 많아 또 했다”며 웃으며 답했다. 그 말대로라면 그 욕심이 결국 화를 자초한 셈이다. 라 전 회장 본인도 지난달 27일 열린 사장단회의에서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연임한 것이 잘못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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