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 "어른 기침소리에 애들 크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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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아버지께서는 말씀이 거의 없으셨다. 언젠가 형님이 대학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왔을 때도 빙그레 웃으시며 한 마디만 하셨다. '어머니께서 기다리신다. 들어가 뵙도록 해라'. 우리 9남매는 아버지 기침소리로 당신의 말씀을 알아들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할 때와 청소하라고 할 때의 기침소리는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 기침소리는 집안의 가장 권위 있는 말씀이었다."(196쪽)

교육서 '나는 항상 아버지 흉내만 낸다'(고려원북스)의 저자인 조정근(71.원광대 이사장) 원불교 종사(宗師)는 선친의 일화 한자락을 책에서 소개한다.

새벽녁 동네 한 바퀴를 돌며 개똥 줍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그 분은 해방 직전 대안학교 '황새물 학교'를 개척했던 동네 교육자. 황새물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잠시 머물렀던 전북 정읍 계룡리의 동네이름에서 따왔다.

"저는 본래 책 이름을 '사람농사 이야기'로 하고 싶었지요. 1977년부터 8년 간 서울 휘경여중 교장으로 근무할 때 현장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내가 바로 서니 남도 바로 선다'는 제 생각, 즉 지금도 저의 우상인 선친으로부터 익혔던 교육관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원불교 고위 성직자인 그가 부르고 있는 '교육의 노래'는 이렇다. "어린 학생들까지도 부처님으로 모시자. 발걸음 닿는 곳 마다 낙원으로 만들자."

이 땅의 남루한 교육현실에 비춰 까마득해 보이는 목표이지만, 책의 스토리들은 설득력이 높다. 교사들의 반대에도 학교 주변을 감싼 앵두나무.사과나무 밭의 철조망을 모두 걷어내 학생들의 신뢰를 일궈 낸 일화, 퇴학없는 학교를 실천한 용기 등은 교육지도자 상으로 매력적이다.

"책에도 썼지만 교육의 '지도'란 '나를 보여준다'는 지(指)자와, 학생들이 가진 가능성을 '끌어내고(引)' '통하게 하는(通)' 역할을 말합니다. 즉, 제가 아는 교육관이란 사람은 누구나 '텅 빈 도화지''텅 빈 상자'로 태어나는데, 그 위에 무엇을 그리고 채울까는 선생님의 몫이라는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10대들은 '정기(精氣)가 없는 불만의 덩어리'로 성장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는 그는, 이렇게 된 것은 부드러운 충고와 실천을 상징하는 부모들의 '기침소리'가 사라진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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