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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을 이어준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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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한 폭의 불화(佛畵) 앞에서 정말이지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불자도 아니고 대단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가로·세로 크기가 61.5cm와 142cm에 불과한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불화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혜허(慧虛)’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것을 그린 승려화가의 법명이리라. 말뜻 그대로 ‘빈 지혜, 혹은 지혜의 비움, 앎의 허허로움’이라고나 할까. 그 법명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700여 년 전 한 승려화가의 말없는 부름에 나 역시 말을 삼킨 채 마음으로 끝없는 얘기를 건네고 있었다.

 # 며칠 전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700년 만의 해후’란 부제가 붙은 ‘고려불화대전’을 보러 갔을 때 일이다. 여러 개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중 으뜸으로 치는 속칭 ‘물방울관음’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의 모습을 누군가 옆에서 봤다면 넋 나갔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관음보살이 버들가지로 정병의 물을 찍어 공중에 흩뿌리자 이것이 버들잎 끝에서 튕겨 떨어져 녹청색의 물방울을 이루고 이 속에 다시 관음보살이 현현하는 놀라운 상상력의 표현이 내 눈 앞에서 7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선 녹청색의 물방울 자체가 관음의 구제력을 상징하는 버들잎의 형상과 같고 그 녹청색 물방울 혹은 버들잎 모양이 광배(光背)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물방울 관음’이란 별칭을 지닌 이 작품은 고려 불화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그 작품 앞에 선 나 스스로가 물방울 모양의 광배 안에 담겨진 느낌이었다. 아니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가히 ‘진품의 위력’이었다.

 # 그것은 그림 이상이었고 종교마저 뛰어넘은 그 무엇이었다. 머리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앎과 삶의 허허로움 속에서 그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700여 년 전 승려화가 혜허가 스스로를 비워내며 그린 수월관음도는 현재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돼 있다. 전문연구자들마저 도록(圖錄)으로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을 만큼 진품이 공개된 적이 거의 없는 혜허의 수월관음도가 700여 년 만에 모국의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작은 기적이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최광식 관장이 전시대여 교섭차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센소지에 소장된 혜허의 수월관음도 자체를 실제 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전설처럼 회자되기만 하던 ‘물방울 관음’을 마주하게 된 최 관장은 자신도 모르게 그 불화 앞에 엎드려 삼배를 했다. 마음 같아선 108배를 할 요량이었지만 공식적인 자리라 그러진 못했다. 센소지 주지는 말없이 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최 관장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 얼마 안 있어 ‘물방울 관음’을 한국의 고려불화대전 전시에 내놓겠다는 믿기지 않는 연락이 왔다. 아마도 불화를 보자마자 전시대여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세상 셈법을 다 접고 허허로이 삼배부터 한 최 관장의 마음모양새에 센소지 주지의 마음도 움직였으리라. 그렇다. 세상만사 마음문제다. 욕심내지 말고 앎을 자랑하지 말며 그저 허허로운 마음으로 대하면 만사가 스스로 풀리는 법!

 # 108점에 달하는 고려불화대전의 전시작품을 모두 둘러본 후 나오던 걸음을 되돌려 ‘물방울 관음’ 앞에 다시 섰다. 전시실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시간이어서인지 더욱 텅 빈 그 공간에서 홀로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았다. 나의 눈물과 ‘물방울 관음’의 커다란 녹청색의 물방울이 포개져 시야가 어른거렸다. 어느새 그 버들잎 형상의 물방울은 내 눈물이 돼 있었고 내 눈물방울 안에 다시 혜허의 ‘물방울 관음’이 담겨졌다. 지극히 짧은 만남이었고, 아마 내 평생에 다시 못 볼지도 모를 일이지만 버들잎 형상의 물방울은 눈물이 돼 혜허와 나 사이의 700년 세월을 녹였다. 700년 만의 해후는 그렇게 나를 울렸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