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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노래를 ‘꽃보다 아름다운’ 아줌마·아저씨께 바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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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 문정동 주택가에 막 둥지를 튼 청소년 문화공간 ‘즐거운 가’에서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비닐하우스에 있던 문화공간이 철거 위기에 몰리자 동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새 공간을 꾸려 줬다. 아이들의 ‘보은 콘서트’를 동네 주민들이 즐기고 있다. [강정현 기자]

“아줌마·아저씨를 위해 부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며칠 전 서울 송파구 문정동 주택가의 한 건물 지하. 고등학생 7명으로 구성된 ‘청개구리 밴드’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관객석에 앉은 이들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청소년 문화공간 ‘즐거운 가(家)’의 문이 열린 날이다.

 #2008년 9월. “우리 의 꿈은 철거할 수 없다.”

 문정동 비닐하우스촌에 법조타운 건립이 결정됐던 날, 이곳에 자리 잡은 ‘꿈나무학교’에도 철거 통보가 날아왔다. 지역아동센터가 마련한 저소득층·한부모 가정 아이들의 공부와 동아리 활동을 돕는 문화공간이다. 이곳엔 공부방과 밴드 연습실이 있는데 10여 년 동안 서로 붙잡아 주고 격려하던 삶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지역아동센터는 뜻있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민간 단체다.

 2006년 공부방은 ㈜SK의 ‘1318해피존’(저소득 청소년 공부방 등을 돕는 사업)에 선정돼 문정동 주택가로 옮겨 갔지만 밴드 연습실은 비닐하우스에 남았다. 주택가로 들어가면 “시끄럽다”는 타박을 견뎌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겨울이 되면 칼바람이 불어닥치는 곳. 아이들은 그곳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음악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2008년 10월. “꿈꿔 온 공간을 그려 보렴. 세상이 너희를 도울 거야.”

 아이들의 ‘엄마’, 엄미경(42·사회복지사)씨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노래했던 35명 모두가 모금함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줄 것은 노래밖에 없었거든요.”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동네로 퍼져 나갔다. 엄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사정을 접한 유코카캐리어스(해상운송업체) 직원이었다.

 “당장 얼마가 필요하십니까?”

 엄씨의 통장에 공간 임대료 1500만원이 들어왔다. 6월, 두 번째 기적이 찾아왔다.

 “이 건물 지하가 비는데 들어올래요?”

 동네 주민의 소개로 만난 건물주는 “지하층의 양말공장이 이사를 가는데 218㎡ 규모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임대료 90만원. 시세의 절반 가격이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공간을 꾸밀 돈이 없었다. 그때 또 다른 ‘키다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건축업자 임모씨는 아이들에게 대뜸 종이와 색연필을 내밀었다.

 “너희가 꿈꾸는 공간을 마음껏 그려 봐.”

 수면실·밴드연습실·카페·도서관…. 공사비가 1억원이 넘었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절반 가격에 떠안았다. 못을 박고 사포질을 하는 데 방학 내내 아이들이 힘을 보탰다. 그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모금액은 3500만원을 넘어섰다. 작은 기적들도 이어졌다. 세탁소 아저씨는 아이들의 교복을 무료로 수선해 줬다. 미용실 아주머니는 아이들의 머리를 수시로 손봐 줬다. 반찬가게 이모는 일부러 반찬거리를 조금씩 더 만들었다. 구청에서 가져온 에어컨, 주민들이 가져온 화분과 담요로 공간이 채워졌다. 즐거운 노래가 가득한 집. ‘즐거운 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2010년 10월. “아줌마·아저씨의 사랑 이제부터 갚을게요.”

 작은 콘서트가 열리는 날, 키다리 아저씨 임씨가 말문을 열었다.

 “성장통을 앓는 아이들을 기다려 주는 공간이 문을 열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죠.”

 아이들의 목표는 이곳을 동네 사랑방으로 만드는 일이다. 카페와 밥집을 운영하며 돈도 벌 계획이다. 카페 운영을 맡은 박성욱(한국예고3)군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 갚지 못한 빚도 있고 앞으로의 운영비용도 막막하다.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희석(가명·중1)군이 웃었다.

 “저는 물론이고 아주머니랑 아저씨도 다들 이곳을 좋아해요. 잘 될 수밖에 없잖아요?”

글=임주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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