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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스테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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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한다.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뀌지야 않겠지만, 책은 분명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보고(寶庫)라는 의미일 게다. 물론 그 길의 초입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책 속 길 찾기는 훨씬 수월해질 성싶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내게 양서(良書)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전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어머니 로사 여사는 자녀 양육 방식으로 ‘책 많이 읽히기’를 실천했다. ‘도서목록’ 수십 권을 만들어 어머니가 고른 좋은 책을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읽게 한 것이다. 대통령이 된 케네디가 “리더와 독서는 결코 뗄 수 없는 인연”이라고 말했던 까닭이다. 책 읽기를 안내해 준 어머니의 힘이 대통령을 만든 원동력이 됐다는 얘기다. 워런 버핏 아버지의 서재는 그 자체가 아들을 위한 ‘독서 리스트’였을 것 같다. 버핏은 여덟 살 무렵부터 증권 세일즈맨이었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을 읽기 시작해 주식과 투자 관련 책을 모두 섭렵(涉獵)했다고 한다. 그런 독서 성향이 버핏을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로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8세기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도 아들에게 ‘꼭 읽어야 할 책’을 일러줬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보낸 편지에서다. “금년 겨울에는 반드시 『서경(書經)』과 『예기(禮記)』중에서 아직 읽지 못한 부분을 다시 읽는 것이 좋겠다. 또한 사서(四書)와 『사기(史記)』도 반드시 익숙하게 읽는 것이 옳다.”(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요즘은 웬만한 대학에서도 학생들이 읽어야 할 도서목록을 제시한다. 서울대가 2005년 고전 중심의 ‘권장도서 100권’을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경희대의 한 단과대도 올해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독서교양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80여 권의 도서목록 중 필독·추천도서 등 12권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내용이다. 그런데 학생회장이 이에 반발하는 단식투쟁을 벌여 화제다. 장학금을 볼모로 ‘억지 독서’를 강요한다는 거다. 플라톤이 정의한 에피스테메는 ‘참된 지식’이다. 진정한 앎이 아닌 ‘각자의 의견’에 불과한 ‘독사(doxa)’의 상대 개념이다. 책 읽기가 에피스테메를 추구하기는커녕 독사의 혼란에 빠진 양상이니 딱한 노릇이다. 이래서야 책 속의 길이 찾아질까.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