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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In&Out 레저] 제주의 봄, 그 거룩한 생명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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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1) 대정 들녘의 보리와 마늘밭.
(2) 서귀포 해안 바닷물에 비친 한라산.
(3) 산방산 아래 사계리의 유채.
(4) 딸기밭에서 김을 매는 아낙네들.

지난 주말, 제주도엔 눈이 내렸다. 한라산은 다시 백발로 변하고 중산간 도로는 교통이 통제됐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한다는 제주도 역시 아직은 겨울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큰 욕심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제주를 헤집고 다녀 보니 곳곳에서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검은 흙은 응결된 습기를 녹여 스스로 부풀었고, 아직 연록의 새순을 내지 못한 차밭에도 윤기가 흘러나온다.

미리 핀 유채는 성급한 상춘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겨울 끝자락과 격한 영역다툼을 벌인 새봄의 선발대는 이제 곧 승리를 선언할 것이다.

제주=최현철 기자<chdc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5)남원읍 한남다원 녹차밭. 멀리 한라산이 열렸다.
(6)봄이 오는 길목을 응시하는 표선 해안의 등.

◆ 눈을 녹이는 생명의 열기

거세게 쏟아붓던 눈이 그치고 조각난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아직 눈이 쌓인 비자림로를 따라가다 절물휴양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복수초 군락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울창한 원시림의 바닥에 낮게 깔려 자라는 복수초는 2월 중순부터 꽃망울을 터뜨린다.

숲속에선 밤새 내린 눈이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에 시나브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힘겹게 잡목 넝쿨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다 보니 옅은 노란색이 얼핏 눈에 띈다. 먼저 핀 꽃이 눈 위로 막 고개를 내밀고 있는 참이다. 조심스레 쪼그리고 앉았다. 신기하게도 눈은 꽃잎 부근에서 먼저 녹는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생명의 온기가 만들어내는 차이인 것 같다. 갓 눈을 헤치고 나온 꽃잎은 아직 창백하다. 그러나 몇 분 동안 햇볕을 쬐면서 금세 생기를 회복한다. 반쯤 닫혔던 꽃봉오리도 슬그머니 기지개를 켠다. 정원에 피었던 꽃이 눈을 맞으면 곧바로 시드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앉아 들꽃의 생명력이 펼치는 느릿한 향연을 오래오래 지켜봤다.

◆ 돌담 안의 바쁜 일손

제주의 밭은 시원스레 뚫려 있는 곳이 없다. 모두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처음엔 네 땅과 내 땅을 구분하기 위해 쌓았던 돌담은 이젠 바람을 막고 방목하는 말과 소가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며 화재가 번지는 것도 차단하는 데 요긴하다.

지금 제주의 돌담 안에선 푸른 기운이 가득 퍼지고 있다.

보리며 당근.마늘의 어린 순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싱싱하다. 제주대 근처를 지나다 마주친 작은 밭도 어김없이 낮은 돌담을 두르고 있었다. 딸기밭이다. 안쪽에선 밭고랑 하나씩을 맡아 김을 매는 아낙네 대여섯 명의 손길이 분주했다. 아직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엔 잡초가 수북한데 그들이 지나온 열두 이랑은 막 깎은 머리처럼 파릇한 새순만 단정히 자리잡고 있었다. 홀가분해진 밭에서 생장을 거듭한 딸기는 봄이 한창인 5월에 수확한다. 아낙의 손끝에서 봄이 영글고 있었다.

◆ 대정 들녘의 수선화

제주에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했던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를 무척 아꼈다. 개량종 수선화의 화사한 노란 꽃잎과 달리 제주 들녘에 피는 야생 수선화는 정갈한 상앗빛 꽃잎을 피운다. 꽃잎 위로 연노랑 꽃술이 살포시 드러나 단아한 모습이다. 추사는 그 모습을 보고 '희게 퍼진 구름 같고 새로 내린 봄 눈 같다'고 표현했다. 구름같고 봄 눈 같은 수선화의 꽃이 한창 피어나는 시기가 지금이다. 추사가 유배됐던 제주 서남쪽 대정 들녘엔 유난히 수선화가 많다. 번식력이 너무 강한 탓에 밭작물을 보호하고자 농부들은 보이는 대로 뽑아낸다. 하지만 돌담을 끼고 도는 길가에는 드문드문 수선화의 수줍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쫓아내도 봄은 기어코 오고야 마는 것인가.

◆ 밉지 않은 장삿속

대정에서 산방산 쪽으로 더 내려가니 작은 유채밭이 있었다. 다른 곳의 유채는 아직 꽃을 피우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곳만 유독 노란 꽃이 흐드러졌다. 밭 한쪽엔 종이상자에 매직으로 '사진촬영 1000원'이라고 적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남보다 먼저 파종해 일찍 꽃을 피운 덕에 밭 주인은 독점적 이윤을 얻는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유채밭을 관광객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뻔히 보이는 장삿속이지만 사진 찍는 이들에겐 고마울 뿐이다. 이마저 없었다면 황량한 모습만 보고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억지로 부추긴 봄이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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