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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도 ‘스토리’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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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최혜실 경희대 국문과 교수

엄마는 지난해 뇌출혈로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심한 저혈당으로 응급실에 갔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셨다. 뇌수술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혼수상태는 계속되었다. 다시 목에는 구멍이 뚫려 호흡기가 꽂히고 배에는 신장 투석을 위한 구멍이 뚫렸으며 코에는 미음이 들어가는 호스가 꽂혔다. 오래 누워있어 생긴 욕창((褥瘡)도 치료해야 했다. 호스에 투입되는 음식물과 약은 무궁무진했다. 곡물이 투입되다 저혈당 증상이 일어나면 당분이, 혈압이 높아지면 혈압강하제, 소화가 안 되면 소화제, 감기 기운이 있으면 감기약이 투입되었고, 몸의부위별로 다른 전공의가 진료를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엄마가 언제쯤 깰 것인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어떤 상태인가였다. 그러나 의사들은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전공에 관련된 몸의 부위만 말했다. 처음에는 의사들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분개했으나, 차츰 병을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 몸의 고통이지만 의사들은 세균이 일으키는 일반적 현상에 관심이 있다. 세균학자가 세균을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적어도 임상의는 세균으로 인해 느끼고 경험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환자의 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추상적인 정신이 아니라 바로 내몸이다. 개인의 몸은 자기 삶의 ‘이야기(story)’를 지닌 고유한 인격체로, 병은 그 인격체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자신의 삶의 의미 속에서 하는 경험인 것이다. 그런데 몸의 고통이 너무 심하면 사람들의 자기 존중의 감정은 무너지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 의료인이 그에게 이미 형성된 이야기로서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삶의 의지를 확고하게 해 고통을 덜어주고 회복을 빠르게 하는 방법이다.

의료행위에서도 ‘서사(敍事·narrative)’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다. 지난 추석 연휴 호주에 여행을 갔다. 그곳의 예방의학과 대체의학은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임신을 원하는 여성이 병원에 가면 의사는 엽산을 준다. 모체부터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다. 크루즈 여행 때 관광 안내원은 한국과 호주의 멀미약을 내밀었다. “한국의 것은 효과가 탁월하지만 부작용이 있고 호주의 것은 자연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효과가 늦고 미약한 반면 부작용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약의 제조방식이 성장·능률 위주의 한국적 서사와 복지·생태환경 위주인 호주의 서사와 각각 일치하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천지인 사상과 음양오행설이란 문화문법으로 구성된 한의학 서사는 당시 조선의 유학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의료 서사가 당대의 가치관, 제도, 문화와 연결돼 총체적인 인간 삶과 긴밀하게 맞물려 왔다는 것은 자명하다. 의료는 단순한 과학이 아니다. 과학을 넘어 ‘문화’이기도 한 것이다.

한국도 이제 성장·실적 위주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복지·공정성을 추구하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미래 한국인의 세계관과 연결되는 의료 서사의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혜실 경희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