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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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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980년 당선돼 집권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세금을 인하하면서 한편으로 국방지출을 늘렸다. 그런데 이로 인한 재정적자 때문에 장기 고금리 국채가 발행되기 시작하자 이 채권을 매수하기 위해 전 세계 투자자들이 달러를 사들이면서 달러는 강세를 보였다. 달러 강세는 수입 증가와 수출 감소로 이어져 무역적자를 야기했고 그만 재정과 무역에서 모두 적자를 기록하는 쌍둥이 적자가 나타났다. 이로 인해 달러와 미국경제에 대한 심각한 신뢰 저하의 가능성이 커지자 당시 미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비교적 발 빠르게 대응했다.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공화당의 실력자 제임스 베이커가 재무장관으로 취임했고 그는 환율 공조를 성공시켰다.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 미·일·영·불·독 5개국 재무장관이 모여 논의를 한 결과 소위 ‘플라자 합의’가 탄생한 것이다. 이 합의를 통해 달러당 240엔 근처였던 엔-달러 환율이 3년여 만에 달러당 120엔대까지 하락하는 엄청난 엔고의 시대가 이어졌다(우리 식으로 보면 달러당 1200원 하던 환율이 600원이 된 셈인데 만일 이런 수준의 원화 절상이 이뤄진다면 우리 수출 기업들은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개선되기 시작했지만 일본은 이때 받은 타격으로 인해 버블의 형성과 붕괴가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힘든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는 플라자 합의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엔고로 인해 일본 제품의 달러 표시 가격이 비싸지면서 일본 제품을 구매하기 힘든 소비자들이 대거 한국 제품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하면서 건국 이래 지속되던 만성적 무역적자는 흑자로 바뀌었고 1986년 2000달러대에 머물렀던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89년 5000달러를 넘고 1995년 대망의 1만 달러 고지를 점령하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것이 아니라 ‘펴진’ 셈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세계경제는 다시금 환율전쟁의 파고에 휩싸이고 있다. 물론 주연배우는 일부 바뀌었다. 적자 주체로서의 미국은 동일한데 흑자 주체가 중국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엄청난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미국의 적자가 달러로 결제되면서 달러가 전 세계로 풀려나갔다. 중국의 대미 흑자 폭은 2000억 달러에 달할 정도였고 지금까지 쌓은 외환보유액이 무려 2조5000억 달러 수준이다. 지속적인 적자에다 위기의 주범이 되면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상당 부분 훼손됐다. 다른 나라들이 달러를 벌어들인 후 이를 가지고 미국의 채권을 사게 되면 달러는 다시 미국으로 환류하게 되므로 별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 주장은 무색하게 됐다. 소위 글로벌 임밸런스(imbalance) 현상이 미국에 엄청난 짐이 된 것이다.

 이제 플라자 합의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25년 전 엔화가 절상됐듯이 이번에는 위안화를 절상하라는 것이다. 과거 식으로라면 위안화는 현행 달러당 6.7위안 정도에서 최소한 4위안대 초반까지 절상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일본과 다르다. 일본이 ‘미국에 노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라면 중국은 ‘미국에 예스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나라다.

 중국의 반발로 엄청난 환율전쟁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다음 달이면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그러나 거꾸로 서울회의는 호기일 수 있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지속가능한 균형성장 프레임 워크’를 기반으로 환율정책에 관한 최소한의 원칙에서라도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지금까지 G20 관련 우리의 전략이 개발과 금융안전망 이슈 등을 기본으로 한 ‘서울 이니셔티브’의 모색이었다면 이제는 환율 관련 합의 추진 전략이 추가돼야 한다. 내년도 의장국인 프랑스는 사르코지 대통령까지 나서서 환율 이슈를 프랑스 회의에서의 주요 주제로 삼고 싶어 안달이다 그러나 환율 문제를 내년까지 그냥 두기에는 사안이 긴박하다.

 이제 시간은 얼마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바짝 노력을 해 환율에 관한 신 플라자 합의로서의 ‘코엑스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서울 G20 회의는 국제공조에 있어서 또 하나의 성공적 회담으로 기록될 것이다. 25년 전 플라자 합의가 우리 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11월에 서울의 코엑스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서울 이니셔티브’와 ‘코엑스 합의’가 이뤄지면서 우리의 국격에 ‘퀀텀 점프(quantum jump)’가 일어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