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과거 인기코너 베끼기 성행 … 시청자 우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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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눈을 가린 가수가 무대 위에 서 있다. "몇명쯤 왔을 것 같으세요"란 MC의 질문에 주위는 더 조용해진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라며 말끝을 흐리는 가수. '텅 비어있으면 어쩌나' 시청자들 마음까지 조마조마하다. 눈가리개를 푸는 순간, 빼곡히 모인 청중을 확인하고 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이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새 코너 '주먹콘'(일러스트 (右))의 한 장면이다. 몇년전 인기를 끌었던 '게릴라 콘서트'(左)와 꼭 닮은 꼴이다. 콘서트의 목적이 '결식어린이 돕기'라는 의미만 더해졌을 뿐이다. 제작진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게릴라 콘서트'의 틀을 빌려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의 인기 프로그램을 재탕한 프로그램들이 줄을 잇고 있다. '전성시대'를 맞은 드라마에 밀려 시청률 확보에 비상이 걸린 오락프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달 MBC '코미디 하우스'에서 처음 선보인 '양은 탁구'는 4~5년 전 인기를 끌었던 '알까기'의 탁구 버전이다. 매주 두 명의 게스트가 나와 벌이는 탁구 대결을 최양락의 해설로 중계한다.

지난해 10월 시작된 SBS '특명, 아빠의 도전'은 1998년 방송됐던 프로그램을 제목까지 똑같이 그대로 다시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가장이 외발자전거 타기, 쌍절곤으로 촛불 끄기 등의 도전과제를 해내면 가족 전체의 소원을 들어주는 형식이다.

SBS 조동석 PD는 "현 경제상황이 실직이 늘어 가장의 기가 꺾였던 98년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부활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MBC 부분개편 때 '심심풀이'에서 독립한 짝짓기 프로그램 '러브 서바이벌 두근두근'은 남성 연예인과 일반인 여성을 출연시켜 '생존게임'을 벌인다는 점에서 KBS2 '자유선언 토요대작전'의 '산장미팅-장미의 전쟁'(2003년)과 같은 형식이다.

'닮은 꼴'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주먹콘'의 경우 인터넷 게시판에는 "게릴라 콘서트를 보는 듯해서 짜증스럽다. 새롭고 신선한 프로그램이 다시 탄생했으면 좋겠다"(KIM1985S) "그렇게 할 만한 아이템이 없나"(CLICKPKH)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러브 서바이벌 두근두근'은 평균 시청률 6.8%(닐슨미디어리서치 조사결과)에 머무른 채 방송 6회 만인 지난달 15일 막을 내렸고, '양은탁구' 역시 다음달 개편에서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연대의 김형진씨는 "시청률을 의식해 새로운 시도를 못하고 인기 프로그램을 본뜨고 있다"며 "방송사는 시청자들에게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제작진 역시 재탕 프로그램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김엽 책임 프로듀서는 "주먹콘을 게릴라 콘서트와 차별화하는 게 숙제"라고 말했다.

주철환 이화여대 교수는 "제작진들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제작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며 "시청자.네티즌을 대상으로 방송 아이디어 공모를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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