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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G20 의장국이 뭐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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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중국은 고정환율제를 포기하지 않기로 작심한 모습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위안화 절상은 전 세계의 재앙”이라며 되레 위협했다. 미·중 환율전쟁의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고 있다. 달러화는 큰 폭의 약세를 보이고, 위안화는 찔끔 절상에 그치면서 다른 나라들이 유탄을 맞았다. 신흥국가들의 통화만 기형적인 초(超)강세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게임의 법칙을 깨는 건 미국과 중국인데, 새우 등 터지는 건 한국이다.

서울은 어느새 핫머니의 놀이터가 됐다. 미국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한국에 투자하는 이른바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한 달간 원화의 평가절상 폭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다. 코스피 지수가 1900선을 넘보고, 채권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외부 유동성의 힘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핫머니는 정치적 계산까지 하면서 덤비고 있다. 한국이 G20 의장국 체면 때문에 다음 달 11일까지 함부로 나서지 못하리라 자신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디플레가 문제라면 한국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3%를 넘어서면 금리를 올리는 게 정석이다. 그런데도 오늘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한국은행의 표정은 어둡다. 금리 인상이 원화 강세를 야기할 것이란 비난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핫머니로 인해 금리정책까지 꼬이고 있다.

한국이 G20 의장국의 체면만 벗어 던지면 해야 할 일이 분명하다. 상당수의 신흥국들이 비상조치에 들어갔다. 투기자금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브라질·태국은 외국인 채권투자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실탄 낭비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국가들도 늘고 있다. 선진국에서 밀려오는 유동성 홍수에 가만히 앉아 당할 수 없다는 자구책이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의 패권(<9738>權)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다. 유로화와 엔화가 죽 쑤면서 더 이상 거칠 게 없다는 분위기다. 미국이 양적 완화에 들어가면 달러 약세는 피하기 어렵다. 중국은 다른 나라들이 속속 외환시장에 개입하자 웃고 있다. ‘환율주권(主權)’의 공동전선을 구축해 미국과 유럽의 위안화 절상 압력을 피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런 대결 구도는 쉽게 풀리기 어렵다. 양적 완화에 골몰하는 선진국들과 핫머니를 막으려는 신흥국들의 대치상황은 상당기간 지속될 게 분명하다.

1930년대 대공황 때는 보호무역주의가 공멸(共滅)을 불렀다. 지금은 자국 경제에만 치중하는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엇박자 금융정책이 문제다. 새로운 게임 규칙이 마련되지 않으면 국제적 마찰은 피할 수 없다. 아무리 환율을 시장에 맡긴다 해도 핫머니 유입에 따른 과도한 환율 변동과 무질서한 움직임은 반드시 차단해야 한다. 다행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핫머니 준동은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국제적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

우리도 더 이상 체면만 차릴 때는 아닌 듯싶다. 소극적으로 외환보유액만 쌓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핫머니 준동에 맞서 방망이를 짧게 잡고 기민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신(新)자유주의에 집착할 때가 아니다. 캐리 트레이드 자금에는 토빈세를 부과하는 방안까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외부에 든든한 울타리를 쌓아야 한국은행도 자신 있게 금리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G20 정상회의는 당연히 축하해야 할 큰 잔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의장국 체면만 차리는 것도 촌스럽다. G20 의장국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