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불쑥 보낸 정성 11년, 시인의 손 따뜻하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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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시인 유안진씨가 제2회 구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유씨는 1967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그는 “지금 나 스스로를 위한 것 중 시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조문규 기자]

1980년대 중반 발표돼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시인 유안진(69)씨의 명산문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일부분이다. 산문은 위선 없이 맨 얼굴로 만나 건강하고 듬직한 우정을 영원토록 이어가자는 내용이다. 이 산문으로 유씨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산문집은 삽시간에 베스트셀러가 됐고, 유씨는 집도 사고 차도 샀다.

그로부터 20여 년, 유씨 스스로가 ‘지란지교…’에 나오는 ‘진실한 친구’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산문에서의 다짐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유씨가 친구의 인연을 맺은 대상은 자신의 고향인 경북 안동의 안동재활원. 유씨는 2000년부터 이곳을 돕기 시작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11년째 후원금을 내고 있다. 재활원에 따르면 유씨의 후원금은 2000년 10만원으로 시작했다. 해마다 금액이 커져 2005년에는 700만원이 넘는 돈을 내놓기도 했다. 후원금 총액은 2600여 만원에 이른다. 유씨는 최근 상금이 5000만원인 제2회 구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12일 “상금 중 3000만원 정도를 재활원에 보낼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80년 처음 재활원을 방문했다. 월간 ‘여성중앙’ 기사를 위해 고향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들르게 됐다. 한 장애인이 탈을 만들던 도중 조각도로 자꾸 자신의 손등을 찌르는 모습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성당을 다녔지만 자신이 가짜 신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유씨는 “백 만 마디 기도 보다 한 번 실천이 낫다고 하는데, 당시 장애인들이야 말로 도움이 필요한 모습으로 세상에 온 하느님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유씨는 주변의 어려운 시설을 돕기 시작했다. 문학상을 받으면 상금 중 시상식 뒷풀이 비용 등을 뺀 나머지는 전액 기부했다. 2000년부터는 한 곳을 집중적으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안동재활원만 후원해 왔다. 재활원 측에 후원금 송금하겠다는 연락 조차 하지 않고 불쑥 보내고 만다.

유씨는 “내가 무슨 위선 떠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후원을 게을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느 샌가 돕고 있더라고 했다. “나도 모르지만 뭔가 나를 그렇게 시키더라”는 것이다.

유씨는 2006년 초 서울대에서 퇴직했다. 2008년 출간한 시집 『거짓말로 참말하기』로 올해 구상문학상을 받았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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