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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세자릿수 시대' 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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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원-달러 환율이 외환위기 직전 수준으로 급락했다. 세계적으로 달러가 다시 약세를 보인 데다 외환시장에 기업과 외국인의 달러 공급이 넘쳤던 게 주원인이었다. 당국의 강력한 개입이 없는 한 일시적으로라도 1000원선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게 시장의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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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락 요인 한꺼번에 겹쳐=22일 환율 하락폭(17.2원)은 1월 6일 하락폭(16.4원)을 넘어서며 연중 최대를 기록했다. 외환시장 안팎과 국내.해외 요인이 한꺼번에 겹치며 환율을 끌어내렸다.

시장 안에선 기업의 수출대금 및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 환전에 따른 달러 공급이 수요를 압도했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연구위원은 "올해 수출 증가세가 둔화하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지난해보다 축소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1월 무역흑자가 6년 만에 사상최대를 기록했다"며 "환율 하락 가능성을 염려하는 기업들이 수출대금을 곧바로 외환시장에 쏟아내고 있고 외국인의 주식투자용 환전까지 가세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세계적인 달러화 약세와 상대적인 유로.엔화 강세도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달러-유로 환율은 이날 오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1.3173달러로 떨어져 전날 토론토 시장의 종가 1.3068달러에서 크게 올랐다. 엔-달러 환율도 도쿄 시장에서 한때 104.52엔을 기록하며 달러당 105엔선이 무너졌다.

시장 관계자들은 한국은행이 20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 중 60%에 이르는 달러화 자산을 유로화 등 다른 통화로 다변화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도 환율 급락에 일조했다고 지적한다. 이날 열린 국회 재경위에선 '외환보유액 통화를 다변화하는 게 필요하다'는 의원들의 지적이 잇따랐다. 로이터 등 일부 외신은 이를 두고 '세계 4위 외환보유국인 한국의 중앙은행이 보유 외환을 다변화할 방침이어서 세계적으로 달러가 약세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달러당 1000원 붕괴도 초읽기=시중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이날 외환시장을 '패닉'으로 규정하며 "2~3일 내로 환율이 1000원선 아래로 내려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11월 이후 상대적으로 안정세를 보이던 환율이 급작스레 떨어지자 손실을 줄이기 위한 손절매까지 가세하는 등 시장 심리가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단기적으로 달러당 1000원이 무너져도 900원대 환율 시대가 본격화할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신 연구위원은 "달러 약세 등 거시적인 변수보다는 외국인 투자자금의 대량 유입 등 일시적인 변수가 더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상반기 1010원, 하반기 990원 등 연평균 1000원대의 환율 전망에는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희갑 연구위원은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등에 따라 원-달러 환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연내 1000원 선이 붕괴된 뒤 900~1000원 사이에서 움직이되 700~800원 대까지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속도가 문제=환율 하락은 국내 상품의 달러 표시 가격을 올려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수출의 대부분을 맡고 있는 대기업들은 환율 하락을 예상해 방어장치를 마련하고 있어 생각만큼 충격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 본부장은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 경기가 둔화할 수 있지만 기업의 외화부채 부담을 낮추는 효과도 있어 기업의 투자수요와 내수 회복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적응할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나현철.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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