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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바람둥이·공부벌레·치맛바람…일본 여성시인이 푹 빠졌던 한글의 맛, 한국의 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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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박선영 옮김, 뜨인돌
232쪽, 1만1000원

‘무언가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는 것.’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시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가 한국에 매혹 당한 이유다. 그가 한국에 끌린 이유는 사실 이보다 더 많았다. 도자기 애호가였던 그의 할머니가 “조선에 가고 싶다. 조선에 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처럼 한국 도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의 조상이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 하여튼 그는 한국의 미술품을 사랑했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과 그 예술』에 감동 받았고, 열다섯 살 때는 김소운 시인의 『조선민요선』에 빠져 들었다. 그가 한글을 익히고 한국을 사랑할 이유는 적지 않았다.

이바라기 노리코

지은이는 1990년 『한국현대시선』을 일본에서 출간해 요미우리 문학상을 받았다. ‘장 폴 사르트르에게’ ‘칠석’ 등 한국을 소재로 쓴 시를 발표했을 정도로 ‘한국 사랑’이 유난했다. 신간은 아사히신문에 연재됐던 칼럼모음집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느낀 한글의 매력, 그의 눈에 비친 한국·한국인·한국문화를 시적인 언어로 맑게 써 내려갔다.

76년 나이 쉰이 넘어서 재일 한국인 선생님의 ‘불타는 수업’에 빠져들어 시작한 그의 한글 공부는 10년 동안 이어졌다. 그에게 한글은 ‘한국인들이 쓰는 언어’ 그 이상이었다. 한글은 “마치 편물(뜨개질)기호 같은 문자”이면서 “그 울림이 낭랑하고 아름다운 언어”다. 그는 ‘바람둥이’ ‘공부벌레’ ‘치맛바람’ ‘땅꾼’ 같은 기발한 명사에 놀라고,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 ‘구관이 명관이다’ ‘밤새도록 울다가 누가 죽었느냐고 한다’ 등 속담의 표현력에 감탄한다. 한국인의 ‘멋’도 그에게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이다. 한국인의 행동에 나타난 ‘멋’을 “장난기와 우스꽝스러움, 박력과 세련미가 미묘하게 혼합된, 복합적인 양식”으로 풀이한다.

그의 한국 사랑은 줄줄이 이어진다. 70년대 중반 그와 함께 한글을 배운 사람들, 어릴 때 본 최승희의 춤, 한국 도자기, 한국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등을 풀어놓는다. 한국을 알고 싶고, 한국인과 친해지고 싶었던 넘치는 호기심과 고운 심성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일상에 대한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해 자료를 뒤져가며 한국·일본 두 문화의 뿌리를 추적하는 탐구심도 대단하다.

책은 1986년에 쓰여졌다. 그럼에도 세월이 무색할 만큼 신선하게 읽힌다. 타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 멈추지 않는 학구열, 담백한 필체 덕분이다. 그는 “1976년에 도쿄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면 이 시절의 상황은 재미난 옛날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세상은 어느새 그의 바람대로 ‘그리’ 되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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