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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인턴 헌법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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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다시 한번 지도를 펴고 살펴보라. 전략적으로 뛰어난 정치가·군인·외교관이 가장 많이 필요한 나라가 어디인가. 대한민국이 몇 손가락에 들 것은 틀림없다. 그런 나라가 지도자를 충원하는 시스템을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두려움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북한과 중국은 국가가 정치 지도자를 키운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는 시스템이다. 중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성장했기 때문에 전략적 사고에 아주 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군 지도자들은 20세쯤에 뽑아 사관학교에서 교육시키고 군에서 체계적으로 성장시킨다. 그나마 국가가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외교관은 시험을 통해 뽑아 왔는데 이 방식은 공정하긴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공정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내놓은 외교 아카데미도 그런 문제 인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뽑는 외교관’에서 ‘길러지는 외교관’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원 확보, 통상협상 확대 등을 고려하면 외교관의 수와 예산은 여전히 쩨쩨한 나라다.

한국 정치의 충원 시스템은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 국가·정당·대학·연구소 어느 곳에서도 정치 지도자는 ‘길러지지’ 않는다.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첫날밤을 맞은 새색시처럼 정치인은 의원에 당선되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를 배우기 시작한다. ‘인턴 헌법기관’은 그렇게 탄생한다. 3, 4선 의원이 돼 뭘 좀 알 때쯤 되면 겨우 60세가 넘었을 뿐인데 원로 취급을 받으면서 은퇴 압력을 받는다.

미국과 영국은 젊은 지도자가 많이 나오는 나라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모두 40대다. 클린턴이나 케네디도 40대에 대통령이 됐다. 이번에 영국의 노동당수가 된 에드 밀리밴드도 41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케머런은 설립된 이래 총리만 19명을 배출한 ‘이튼스쿨’ 출신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정치와 선거를 배운 것이다. 미국도 하버드 케네디 스쿨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에서 정치 지도자들을 ‘기르고’ 있다.

우리는 놀랍게도 정당에서조차 교육하지 않는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미국 공화당의 교육기관인 ‘리더십 인스티튜트’를 방문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곳을 다녀온 후 그는 “한나라당에는 바이블도 없고, 신학교도 없고, 목사도 없고, 설교도 없고, 전도도 없다”고 한탄한 바 있다.

더 한심한 것은 공천 방식이다. 선거에 나갈 후보를 고를 때는 당연히 당에서 훈련받고 성장한 보좌관이나 지방의원 출신들을 우선 고려해야 할 텐데, 안 하겠다는 사람을 굳이 벼락 전업시켜 국회에 앉혀 놓는다. 그렇게 얼떨결에 들어온 명망가는 지도자로 성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훈련받지도 않았고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일찍 시작해야 한다. 오바마와 클린턴 모두 이른 나이에 주의원과 주지사에 당선됐기 때문에 40대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낙마하긴 했지만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40대에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것도 일찍 정치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도지사를 두 번 거치고도 그는 40대였던 것이다. 다른 분야처럼 이젠 선출직에도 20대가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 40~50대에 국가를 책임지는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다.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고도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 리더십이 위기를 맞지 않는다. 이제라도 국회나 정당 혹은 대학에 정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만들어져야 한다. 정치 지도자를 키우는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나라의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