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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지식인의 ‘새로운 아편’이 된 담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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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생태주의의 빛과 그늘(하)

때론 아류상품에도 뜯어볼만한 게 있는 법이다. 특유의 절충주의 태도 때문에 좋다고 소문난 것은 염치 없이 쓸어 담기 때문인데, 새 책 『시속 12킬로미터의 행복』이 그러했다. 경영학자 강수돌이 쓴 이 책은 ‘생태주의 종합세트’다. 이제는 전설인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헬레네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그리고 아동작가 권정생까지 끌어들인다. 느리게 사는 삶, 어머니 대지에 대한 예찬 등 생태주의의 단골 품목이 총동원된다.

근무하는 대학이 세종시에 있어서 예전에 귀농했고, 현직 교수이면서 동네 이장으로 일했다는 그의 생태주의 신념은 그 자체론 나쁘진 않다. 책의 문장도 안정됐다. 하지만 강수돌 표 생태주의는 너무 공격적이다. 산업주의란 곧 파괴주의라며 비판하며 4대강 개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강 정비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삽질”(28쪽)이자, 우주의 질서를 깨는 행위란다. 그는 “개발론자에게 영혼이 있나?”라고 묻기도 한다. 선악 이분법의 태도, 그리고 놀라운 오만함에 기가질린다. 스스로 생태교(敎)의 제사장쯤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칼 세이건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지적한 대로 스스로 가짜 과학의 늪에 빠져 사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지식인과 자본주의』의 저자 앨런 케이헌은 “생태주의=지식인의 새로운 아편”으로 지적할 정도다. 19세기 이래 서구 지식인은 반(反)자본주의에 열중해왔는데,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은 생태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소비주의· 개발주의 철학을 바꾸지 않는 한 자본주의에 구원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묻지마 반 개발주의, 눈먼 반 자본주의 심리야말로 지난 번 언급했던 급진 생태주의의 ‘숨은 그림자’다. 바로 여기에서 생태주의가 가진 정치성이 싹 튼다.

서구 지성사에서 생태주의의 출발은 19세기 낭만주의 운동이다. 영국인 윌리엄 모리스, 그리고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중심인물이다. 이중 급진 생태주의는 소박한 자연 사랑을 넘어 근대사회의 ‘성장의 철학’ 자체를 부정한다. 그런 철학의 비조는 존 스튜어트 밀이며, 1972년 그 유명한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에서도 등장했다. 신기한 건 그들이 내놓는 묵시록적 예언은 항상 틀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신자 그룹을 확보한다. 로마클럽 보고서의 일부 내용을 기억하실 것이다.

보고서는 아연·금·석유·천연가스 매장량이 고갈되는 해를 1992년으로 설정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문명이 붕괴된다는 거의 단정조의 예언이었다. 그게 오판에 그쳤다는 건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고 생태주의가 고개 숙인 건 아니다. 사실 서구 생태주의 움직임이나 담론이란 우리에겐 그저 참조항목이다. 문제는 이 땅의 교조적 생태주의자들이다. 뜻이야 일단 좋다.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메시지도 경청할만하다. 하지만 점점 권력화·정치화되면서 귀까지 어두워진다. 그리고 턱없이 오만하다. 정말 선하고 귀하게 출발한 게 망가질 때는 더욱 심하고 추할 수도 있을까?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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