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f&] 20㎏ 백 메고도 씩씩하게 다녀요, 든든한 ‘엄마 캐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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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KLPGA투어에서 부모가 캐디를 맡는 경우는 전체 선수의 절반 정도인 60여명 선이다. 전문 캐디가 없거나 하우스 캐디를 구하지 못해 부모가 가방을 메는 경우다. 그중 엄마 캐디는 3분의 1 정도인 약 20명이다. 박시현도 적당한 하우스 캐디가 없을 때 엄마가 가방을 챙긴다. 엄마는 1980년대 여자배구 국가대표 미녀 센터로 이름을 날린 유애자(48)씨다.

1980년대 여자 배구계에서 ‘미녀 센터’로 이름을 날렸던 유애자(왼쪽)씨는 올해 KL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딸 박시현의 캐디를 맡고 있다. 유애자씨와 박시현이 소피아그린 골프장에서 연습 라운드 도중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상선 기자]

박시현은 올해 KLPGA투어에 뛰어든 신인이다. 지난해 초청선수로 몇 경기만 뛰었는데도 엄마를 닮은 외모와 늘씬한 키(1m75㎝) 때문에 베스트 드레서에 선정됐다. 그의 남동생 박성호(20)는 마음만 먹으면 400야드를 펑펑 날려대는 장타자다. 장타 대회 때마다 우승을 휩쓰는 유망주인데 그 역시 남자 프로투어에 뛰어들 계획을 갖고 있다. 아버지 박씨는 태권도 8단으로 경호 승무원을 했으며 경기도 광명시에서 태권도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딸은 필드에서 가장 예쁜 베스트 드레서로 꼽히는데 엄마 유애자씨는 화장도 안 하는 털털한 스타일이다. 커다란 모자만 푹 눌러 쓰고 다닌다.

“선크림하고 립스틱만 대충 바르는데 가방을 메면 워낙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금방 지워져요. 자외선 차단제도 큰 효과가 없어요.”

캐디백의 무게는 20㎏ 정도다. 선수용 가방 자체가 무거운 데다 넣을 것도 많다. 바나나·과자 등 음식에 수건·우산·바람막이와 비옷·스웨터·솔·비상약·연습기구에 이르기까지 챙길 게 많다. 캐디는 그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날렵해야 한다. 그린에서 퍼트라인을 밟는 캐디와 굼떠서 경기 리듬을 깨는 캐디를 선수들이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유애자씨는 선수 출신이라 키도 크고 체력이 좋아 굼뜨거나 리듬을 깨는 일은 없다. 그래도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유씨는 “한국 골프장에는 언덕이 많아 캐디백을 메거나 끌고 따라다니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태양열에 지열까지 올라오면 현기증이 난다”고 말했다. 아빠 캐디들 역시 힘에 부치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 일도 있었다.

A선수의 캐디백을 끌던 아빠 캐디는 “늦게 쫓아온다”고 딸에게 핀잔을 들었다. 공이 그린에 올라가자 그는 딸에게 퍼터를 주고 다음 홀 티잉그라운드로 먼저 이동했다. 그곳에서 쉬면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딸이 친 공은 그린을 지나 에지까지 굴러가 버렸다. 딸은 웨지로 칩샷을 하려고 캐디를 찾았으나 아버지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결국 퍼터를 사용했다가 보기를 했다. 딸은 “아버지 때문에 보기를 했다”고 짜증을 냈다. “미안해 하면서도 서운해 하는 그 아빠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 난다”고 유씨는 말했다.

라운드를 하려면 준비물도 많다. 투어 캐디는 백에 음식·비상약·연습 도구 등을 넣고 다닌다.

엄마 캐디는 더 힘들다. 지난달 현대건설 서울경제 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이정은의 엄마는 체구도 가냘픈데 딸의 캐디를 맡는다. 그런데도 무척 빠르다. 다른 엄마 캐디들이 “정은이 엄마는 날아다닌다”고 감탄을 할 정도다. 지난해 첫 우승한 이후 이정은과 엄마는 펑펑 울었다.

박시현의 어머니 유애자씨는 “옆에서 보니 정은이 엄마가 이를 악물고 악으로 뛰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이정은의 어머니는 이후 캐디를 그만뒀는데 딸의 성적이 저조해지자 다시 캐디백을 메고 딸을 우승시켰다.

6일 현재 박시현의 상금 랭킹은 91위다. 내년 시드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그러나 유애자씨는 “비교적 늦은 중학교 때 골프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잘했다”면서 딸의 등을 두드렸다.

골프장의 하우스 캐디가 코스의 함정과 그린의 브레이크를 더 잘 살피지만 엄마 캐디가 많은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대회 때 선수의 가방을 메겠다고 나서는 하우스 캐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회 때마다 하우스 캐디는 20명 선에 불과하다. 그나마 뛰어난 캐디는 주요 선수들이 입도선매한다고 한다.

경제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주당 캐디피로 50만~60만원이 들어간다. 상위권 선수들은 큰 문제가 없지만 일반 선수들에겐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그래서 요즘은 남자 세미프로가 KLPGA 투어에서 캐디 전속 계약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1년 기본급 2000만원에 상금에 따른 인센티브 계약을 별도로 맺는다.

그래도 엄마의 힘은 크다. 만약 ‘엄마 캐디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이정은·송민지·박보배의 모친은 첫 번째로 들어갈 만한 사람이다. 남자 투어에서는 과거 배상문의 모친이 ‘엄마 캐디’로 이름을 떨쳤다. 미국 LPGA 투어에선 훌리에타 그라나다(파라과이)가 엄마 캐디와 동반 라운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엄마 캐디의 장점은 딸의 몸과 심리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것이다. 외지에 나가서 손수 음식을 챙겨줄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유씨는 운동선수 출신이어서 선수 심리에도 정통하다. 유씨는 “부모 캐디는 상황이 나쁠 때 선수를 구박하는 경향이 있는데 안 좋은 때일수록 용기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유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딸의 기를 살려준다. 배구에서는 공격이 성공했을 때 파이팅을 잘 외치는 것도 실력이다. 그것을 연습하기도 한다. 박시현이 버디를 잡거나 좋은 샷을 하면 유애자씨는 큰 소리로 칭찬해 준다.

유씨는 “골프를 제대로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뭘 도와주고 싶어도 내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고 말했다. 그 점에선 아빠 캐디가 낫다. 아빠 캐디는 대부분 골프를 잘 안다. 그러나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박시현의 아버지 박상학씨는 “아빠가 운전을 잘하지만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면 문제가 생기는 경우와 비슷하다. 아버지는 딸의 실수를 참지 못한다. 프로 투어에선 딸의 상금 순위가 부모들의 서열이 되기도 하는데 딸이 못하면 아버지는 기가 죽는다. 그래서 자식이 실수하는 걸 보면 화가 난다”고 털어놓았다.

초보 캐디는 실수도 한다. 서울경제 현대건설 여자오픈에 출전했던 아마추어 장수연의 아버지는 캐디백을 목표 방향에 부주의하게 놨다가 2벌타를 받았다. 결국 아버지의 부주의로 딸의 우승을 날린 셈이 됐다. KGT 신한동해오픈에서 우승한 존 허의 아버지는 지난해 캐디백을 메다 너무 힘들어 카트를 탔다가 역시 2벌타를 받기도 했다.

유애자씨는 “잘되면 자기 실력 덕분이고 잘못되면 엄마 탓을 할 때 서운하다. 그러나 좋은 샷을 하고 상금 등으로 선물을 해주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박시현은 “지난해 시드 선발전을 앞두고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소피아그린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했다. 한겨울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따라다니며 챙겨주신 엄마의 은혜를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여주=성호준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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