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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공포의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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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공포의 문화
원제 The Culture of Fear
리 글래스너 지음, 연진희 옮김,
부광, 290쪽, 1만5000원

건강염려증, 테러와 범죄에 대한 공포, '적화야욕에 불타는 북괴의 기습 남침'에 대한 공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갖가지 공포에 시달린다. 언론은 연일 무서운 소식을 전하고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말세'라고 하지만 세상은 좀처럼 망할 줄 모른다. 사회학자 배리 글래스너는 우리가 접하는 공포의 소식들이 대부분 근거가 빈약하고 과장돼 있다는 점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지적하고, 공포에 대해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권고한다.

90년대 중반 미국 언론매체에는 매년 220만 명이 직장에서 폭행 당하고 직장에서 죽은 사람의 주요 사망 원인이 살인이라는 등, 직장폭력 관련 보도가 이례적으로 많이 등장했다. '옆에 앉은 동료가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 그러나 1억2000만 미국 노동인구 중 약 1000명이 일하다 살해되며, 직장 발생 살인의 99% 이상은 외부 침입자 소행이고, 동료나 고용인에게 살해될 가능성은 번개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훨씬 더 낮다.

언론이 직장폭력을 집중 보도한 것은 기업 인수합병으로 인한 대량 실직을 사회문제로 직접 다루지 않고 비켜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만 명을 해고하고 수백만 달러 인상된 연봉을 받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 직장인에게 악역을 맡긴 것이다. '도덕적 불안을 자극하고 그에 대한 상징적인 대응물을 제공하는 자가 부와 권력을 차지한다'면, '무의식적 불안을 자극하면서 공포를 포장하는 기술을 갖춘 영리한 공포 행상인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다음과 같은 공포 마케팅 기술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첫째, 발언 내용의 타당성과 상관없이 말을 잘하고 높은 직함을 가진 권위자 혹은 전문가를 등장시키고, 이어서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보통 사람을 등장시킨다. 엽기적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살인범의 이웃은 꼭 이렇게 말한다. '평소 예의바르고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믿어지지 않아요.' 평범한 나의 이웃이 언제 살인마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스멀스멀 일어난다.

둘째, 통계 수치로 장난을 친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응급의학계는 부양능력이나 부양의지가 없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이 연 7만 명이라고 추정한다'고 보도했지만, 질문서를 받은 의사 900명 중 응답한 사람은 169명에 불과했다. 의사들은 평균 매주 8명의 유기 노인을 본다고 답했고, 기자는 8에 52주를 곱하고 다시 169를 곱해 7만이라는 수치를 끌어냈다.

셋째,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버린다. NBC 뉴스는 에볼라 바이러스 관련 보도에서 영화 '아웃브레이크'의 충격적인 장면들을 전문가들의 예측과 교차 편집하여 내보냈다.

마지막으로, 마술사가 관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미스디렉션 기술이다. 90년대 중반 미국 언론은 구타당하는 남편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정작 보도들이 근거로 삼은 연구는 남편에게 심각한 상해를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여성이 그 반대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 강조했지만, 언론은 그 점은 슬쩍 가리고 다른 면만 부각시키는 '마술 쇼'를 벌였다.

99년 출간 이후 이 책이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정체불명의 위험에 비용을 지출하는 동안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라는 지적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죄에 대한 과장된 공포는 더 많은 경찰과 수감 시설, 범죄예방 캠페인, 요컨대 더 많은 공공지출로 이어지지만 범죄율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른다. 사태의 선후본말(先後本末)을 정확히 판단하는 게 어디 미국 사회만의 과제일까.

이런 종류의 미국 논픽션 도서들이 대부분 그렇듯 많은 '미국적' 사례들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우리 사회 현실을 대입시켜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공포의 사회적.역사적 위력을 깊이 이해하려면 필립 쿤의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책과 함께)과 조르주 르페브르의 '1789년의 대공포'(까치)가 지름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권고로 이 책을 끝마치고 있다. '선거 때 우리는 공포보다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후보들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화성인의 침공을 믿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표정훈(출판평론가)

◆책갈피

"소위 인터넷중독의 전문가로 (미국 언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사람은 심리학자 킴벌리 영이다. 언론인들은 그녀를 '세계 제일의 정신과의사'라 표현했다. 그러나 그녀의 '탁월한 연구'는 비과학적 표본으로부터 얻은 신빙성 없는 보고에 기초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녀는 온라인에서 그녀의 메일에 응답해준 사람을 표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통념에 도전하는, 더 읽을 만한 책들

'틀렸다 1-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러스 킥 지음, 장순욱 옮김, 창과창)

'지적 사기'(앨런 소칼 외 지음, 이희재 옮김, 민음사)

'달걀껍질속의 과학'(로빈 베이커 지음, 유은실 외 옮김, 몸과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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